말 없는 시를 말하는 그림으로
이미지를 포착하는 기민한 상상력
이야기를 추출하는 비평의 감각
‘이미지텔러’ 류신의 세 번째 비평집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비평 활동을 시작한 문학평론가 류신의 세 번째 평론집 『말하는 그림』이 ‘민음의 비평’ 시리즈의 아홉 번째 도서로 출간되었다. 두 번째 평론집 『수집가의 멜랑콜리』 이후 8년 만이다. ‘민음의 비평’은 한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당대 문학을 비평하는 테마 비평집 시리즈다. 류신은 세 번째 비평집 『말하는 그림』의 테마로 ‘그림’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는 시의 이미지를 이야기로 번역하고, 시의 이야기를 이미지로 구현한다. 류신의 시 비평에서 도드라지는 작업은 바로 시를 그림처럼 연상하는 것이다. ‘말 없는 시’를 ‘말하는 그림’으로 이해하는 것. 이러한 비평 작업을 정확히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이를 독자에게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그는 도형, 회화, 이야기라는 튼튼한 세 다리를 세운다. 우리는 노련한 ‘이미지텔러’ 류신의 안내와 함께, 그가 세워 놓은 비평의 가교를 건너 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도형을 든 수학자처럼, 캔버스를 마주한 화가처럼, 이야기를 짓는 소설가처럼
온 감각으로 응시하는 총동원의 시 비평
시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또렷하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류신은 스스로가 세운 비평의 테제에 보다 정확히 도달하기 위해, 그리고 불가해한 시의 이미지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비평의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세 가지의 다리를 세운다. 첫 번째는 도형, 두 번째는 회화, 세 번째는 이야기다. 1부는 ‘시는 도형처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류신은 점, 선, 면, 입체 혹은 이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도형을 이용해 너무나 무한해서 막막한 시의 이미지를 일정한 물리적 크기 안에 담아낸다. 도형이 시의 본질을 구현하는 이미지의 모형으로 적합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1부에 실린 글은 삼각형(멜랑콜리 시학), 마름모(손택수의 시), 오각형(2000년대 시의 윤리), 육각형(임선기의 시), 팔각형(이시영의 시), 현(김명수의 시) 등이다.
2부의 부제는 ‘시는 회화처럼’이다. 류신은 선이나 색채로 평면에 그려진 형상인 ‘회화’가 시가 지닌 이미지를 친근하고 생생한 이미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도가 높다고 보았다. 2부의 수록된 글들을 살펴보면 류신이 포착한, 시와 회화가 상응하는 장면들이 있다. 이기인 시의 영혼은 세밀한 감정선으로 소묘된 에곤 실레의 초상화에서 그 윤곽이 선명해진다. 장석주 시의 드넓은 품은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로 체현된다. 강기원의 시는 요제프 알베르스의 색체구성화로, 김언희의 시는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으로, 김충규의 시는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화로, 조인호의 시는 에밀 놀데의 표현주의 그림으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류신은 2부의 글들을 통해 ‘시혼의 미술관’을 열고 싶었다고 말한다.
3부의 부제는 ‘시는 이야기처럼’이다. 3부의 글들에서 류신은 이미지가 품은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발아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시적 이미지에 내재한 서사를 소설과 희곡 형식으로 풀어 본 글들이 3부에 수록되어 있다. 사막에서 낙타가 보낸 사해문서(이응준의 시)에 대한 이야기부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쓴 이상한 이야기(장석원의 시), 광장에서 촛불을 든 성냥팔이 소녀의 동화(이설야의 시)까지. 신경을 난도질하는 잔혹극(김경후의 시)도, 가족극 형태의 아방가르드 시극(서상영)도 있다. 천 일 동안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던 어느 왕의 방처럼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책머리에서 류신은 시인 존 드라이든의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시의 생명이자 정점이다.”라는 말로 인해 시의 침묵에 대해 회심(回心)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전까지 시의 내부에 숨은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 예리한 분석으로 시와의 완전한 소통에 성공하는 것이 그가 시를 대하는 태도였다면, 이후 그의 비평 작업은 시를 이해하지 않고도 전달하는, 또는 전달하기 위한 방향으로 접어든다. 애초부터 무엇을 말하지 않는 시, 그런 시와는 대화가 아니라 응시가 필요하다고 류신은 말한다. 그는 도형을 다루는 수학자처럼, 회화를 다루는 화가처럼, 이야기를 자아내는 소설가처럼 시를 비평한다. 비평집 『말하는 그림』은 그런 그의 비평관을 성실히, 고스란히 실천한 결과물이며, 그가 사랑한 시들에 대한 고백의 산물이다.
■본문에서
시는 최소성 속의 최대성이다. 시는 작지만 자신이 곧 우주다. 시는 모순과 역설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작은 신(parvus deus)’이다. 시는 애초부터 무엇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 말하지 않으면서 전부 말한다. 아치볼드 매클리시(Archibald MacLeish)의 시구처럼 “슬픔의 긴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을 위해서는 비스듬히 기댄 풀잎들과 바다 위 두 개의 불빛” 3이면 충분하다. 시는 이미지로 말하는 작은 신이다. 이미지가 전언을 창조한다. 시는 이미지의 파천황(破天荒)이다. 그러므로 시 텍스트는 대화의 파트너라기보다는 응시의 캔버스다. 침묵하는 시에서 표상된 이미지를 ‘보는’ 방법이 중요하다. 메시지를 뒤쫓는 분답(紛沓)한 열정보다 이미지를 마중하는 진득한 기다림이 절실하다. 아울러 언제 육박해 올지 모르는 이미지(image)를 포착하는 기민한 상상력(imagination)이 필요하다. 시를 ‘그림처럼’ 연상하는 비평의 감각이 요구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6, 7쪽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이미지는, 시가 내 몸과 신경에 미친 영향의 흔적이었다. 그렇다. 이미지는 “어떤 근본적인 마주침의 대상이지 결코 어떤 재인(再認)의 대상이 아니다.” 6 호라티우스는 이러한 이미지와 직면하는 방법, 즉 이미지를 체득하는 비평적 감각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호라티우스가 준 또 하나의 선물은 “시는 그림과 같습니다.(ut pictura poesis)”라는 첫 문장이다. 모든 시인이 시를 그림처럼 쓰는 것은 아니다. 이 시작법을 따라야 한다는 당위는 시의 영토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모든 ‘시는 그림처럼’ 볼 수 있다. 시는 이미지의 수원(水原)이기 때문이다. 시는 말하는 그림, 이것이 양보할 수 없는 내 비평의 테제다.
―8, 9쪽
태초의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번역하는 이미지텔링 비평은 시의 맨 앞을 복원하는 일과 마찬가지다. 시가 세상에 내보낸 최초의 신호를 해독하는 일이 이 작업의 목적일 적이다. 스토리는 “그래서 또 그래서”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서술이다. 원초 이미지에 잠재된 이야기를 유추하는 비평 작업은 시의 전사(前史)를 추론하는 일과 유사할 것이다. 동시에 스토리텔링 비평은 시의 맨 끄트머리를 보장해 줄 수도 있다. 이미지는 하나의 특정한 이야기에 고착되지 않는다. 원본(Original)으로서의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늘 새로운 이야기를 생산하며 자신을 갱신한다.
―14쪽
책머리에 5
1부 시는 도형처럼
낭만주의 육각형 ─ 임선기 『꽃과 꽃이 흔들린다』 23
포에티카 옥타곤 ─ 이시영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58
은유 마름모 ─ 손택수 『나무의 수사학』 93
멜랑콜리아 삼각형 ─ 김행숙, 심보선, 진은영, 이장욱, 김민정, 황병승 102
시적 에토스의 오각형 ─ 2000년대 시의 윤리학 136
언어의 코드(chord) ─ 김명수 『언제나 다가서는 질문같이』 152
2부 시는 회화처럼
납작한 당신의 등과 어깨 ─ 이기인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173
백적흑청 사색 시학 ─ 강기원 『지중해의 피』 190
숭고의 제사장 ─ 김언희의 시 세계 207
허공의 미궁 ─ 김충규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232
속도의 시학, 주름의 미학 ─ 김재홍 『주름, 펼치는』 242
표현주의 돌격대, 미래주의 특전사 ─ 조인호 『방독면』 263
흑해로 가는 길 ─ 장석주 『몽해항로』 275
직유와 사랑 ─ 김병호 『검은 구두』 285
모든 것은 빛난다 ─ 이병일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 306
3부 시는 이야기처럼
사막에서 보낸 편지 ─ 이응준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325
촛불을 든 성냥팔이 소녀 ─ 이설야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341
디제이 울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장석원 『역진화의 시작』 361
안티 오이디푸스 시극 ─ 서상영 『눈과 오이디푸스』 374
반서정의 잔혹극 ─ 김경후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404
슬픈 사랑시로 쓴 아방가르드 시론 ─ 박상순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422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 ─ 시와 소설의 상호 텍스트성 427
에필로그: 걸어가는 시 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