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Le Cahier Gris
글 로제 마르탱 뒤 가르 | 옮김 정지영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8년 8월 3일
ISBN: 978-89-374-2946-0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13x188 · 164쪽
가격: 9,800원
시리즈: 쏜살문고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예민한 두 사춘기 소년이 벌인 일주일간의 가출 사건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마르탱 뒤 가르가 그리는
소년들의 풋풋한 비밀
노벨 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대표작 『티보 가의 사람들』 첫 권에 해당하는 『회색 노트』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지난 2000년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의 정지영 교수가 필생의 역작으로 선보였던 『티보 가의 사람들』을 가볍고 읽기 쉬운 쏜살문고로 다시 정리해 선보인다. 『티보 가의 사람들』은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등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거장들이 입을 모아 격찬한 작품으로, 웅대한 대하소설의 시발점이자 일종의 교양 소설 혹은 성장 소설이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나 억압적인 가톨릭 교리 속에 성장한 앙투안과 자크 티보 형제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자유분방한 프로테스탄트 집안의 다니엘과 자크가 교류하면서 빚어내는 우정과 영혼의 교감을 들여다볼 수 있다. 『회색 노트』를 통해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보았을 인생의 고뇌와 방황, 정열과 반항의 충동을 절절히 공감하고, 또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1 ― 7
2 ― 20
3 ― 32
4 ― 41
5 ― 54
6 ― 69
7 ― 86
8 ― 126
9 ― 146
첫 반항, 첫 고독을 함께한 친구의 존재
『회색 노트』는 1904년 5월 초의 어떤 일요일부터 일주일 동안 일어난 사건을 그리고 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이자 파리에서 명망을 떨치고 있는 티보 집안에는 아들이 둘 있다. 의사로 일하는 맏아들 앙투안과 그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반항적인 차남 자크이다. 자크는 학교에서 불성실한 태도로 학교 교사와 신부들의 집중 관찰 대상이지만, 동시에 사람을 끄는 독특한 매력과 예술적 감각으로 뭇 학생들의 시선을 끈다. 학교에서 자크는 모든 사람들이 예의 주시하는 프로테스탄트 집안 출신의 다니엘 드 퐁타냉이라는 학생을 만난다. 예민한 감각과 성숙한 태도의 다니엘은 곧 자크와 내밀한 친구가 되고, 이들은 학교 선생의 눈을 피해 회색 천을 덧댄 노트에 서로의 비밀 이야기를 공유하며 점점 더 깊은 관계를 쌓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은 강압적인 학교 선생님에게 비밀 노트를 들키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들이 노트에 주고받은 우정은 열렬한 동시에 순수하기 때문에 동시에 어른들의 시선에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두 소년의 ‘문제적’ 태도는 선생과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과 엮여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 가고, 결국 둘은 어느 날 비밀스럽게 가출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파리의 집을 나와 마르세유까지 기차를 타고 간 두 소년은 낯선 도시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의견의 충돌을 빚게 된다. 밖으로 나도는 바람둥이 아버지 대신 자신을 사랑하는 엄마가 걱정된 다니엘은 자크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제안하지만, 극단적인 성격의 자크는 돌아가느니 자살을 하겠다며 거부한다. 그렇게 마르세유에서의 첫날 밤이 지난 후, 두 소년의 우정은 그 순수함을 잃고 만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와 탈출의 테마
『회색 노트』의 주요 테마인 ‘탈출’은 시대상을 생각하면 그리 낯선 소재가 아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 문단에서는 일련의 작가들이 프랑스로부터의 탈출, 유럽으로부터의 도피를 부르짖었다. 그러한 작품의 한 예로 자크와 다니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있다. 기성 가치관으로부터의 해방, 도덕관의 부정을 주장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배를 타고 떠나라는 그 정열적인 호소를 일부에서는 부도덕한 것으로 규탄하기도 했으나, 어쨌든 그 호소가 당시의 젊은 세대를 열광시켰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마르탱 뒤 가르의 ‘탈출의 테마’도 당시의 가톨릭적 부르주아 사회라는 견고한 인습 제도에 대해 반항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자크의 경우는 엄격한 가톨릭적인 가정과 학교 분위기에서 도망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인 다니엘에게 접근했다고도 볼 수 있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자란 탓에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다니엘에게 청순한 자크의 감수성이 이끌렸던 것이다. 작가는 퐁타냉 가의 우아하고 자유로운 환경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퐁타냉 가정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퐁타냉 가의 가장인 제롬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소설 속에서는 그의 아들인 다니엘 역시 그 핏줄을 이어받아 방탕한 생활로 빠져들 가능성이 암시된다. 이러한 두 소년의 사회적, 가정적 분위기의 차이는 처음에는 둘 사이의 우정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 서로 다른 인생길을 선택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총 19년에 걸쳐 완성된 대하소설의 시발점
『회색 노트』로 시작된 『티보 가의 사람들』의 문학사적 의의
프랑스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1904)를 시작으로 쥘 로맹의 『선의의 사람들』(1932)에 이르기까지 대하소설이 크게 유행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 가의 사람들』은 이들 대하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특히 알베르 카뮈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에 관한 평론에서 『티보 가의 사람들』이야말로 20세기 최고의 문학이며, 최초의 사회 참여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문단의 분위기 속에서 마르탱 뒤 가르는 문학을 통해 반전 운동과 평화주의 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1937년 노벨 문학상을 받기에 이른다. 『티보 가의 사람들』은 『회색 노트』, 『소년원』, 『아름다운 계절』, 『진찰』, 『라 소렐리나』, 『아버지의 죽음』, 『아름다운 여름』, 『에필로그』까지 모두 여덟 부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1부에서 6부까지)의 주제인 가정 이야기와 후반부(7, 8부)의 주제인 전쟁의 열병을 앓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기나긴 여정을 통해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프랑스 당대의 사회현실과 가정 내의 내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드러낸 작가의 거대한 문학적 목표 의식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의 대가로서의 기질은 각 개인이 연속적인 사건 속에서 그들이 대변하고 있는 듯한 한 세대의 특징적인 삶의 방식과 양태를 예리하게 파악하여 생생하게 그려낼 때 더욱 돋보인다. 특히 표현 의지에 따른 문체, 구성에서 나타나는 능숙함, 소설에 부여하는 여유, 뛰어난 묘사의 감각 등은 비판의 여지가 없다.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엄숙한 사랑을 바탕으로 쓴 이 작품은 인간에 대한 환상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 특별한 가치를 지닌 자료라 할 수 있다. 비록 우리의 문화권과 다르고 또 시기적으로도 오래전의 이야기이나 그 당시의 젊은이들이 느꼈던 고뇌, 가정 문제, 한 사회 전체가 겪은 고통은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이런 뜻에서 『티보 가의 사람들』은 현대의 고전인 동시에 미래의 인간상을 예고하는 선구자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본문 중에서
“노에미…….” 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단숨에 이렇게 말했다. “내 남편을 돌려줘.” 프티 뒤트레이유 부인의 사교적인 미소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퐁타냉 부인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였다. “아무 대답 안 해도 좋아. 난 너를 나무라지 않아. 제롬이 한 일일 거야……. 그이가 어떤 사람인지 난 잘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47쪽)
나는 그 순간들은, 우리가 완전히 서로의 것이 될 수 있었던, 아, 너무도 짧고 너무나 가질 기회가 적었던 그 순간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너는 나의 유일한 사랑!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랑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아. 너에 대한 그 많은 열정적인 추억이 곧바로 나를 괴롭힐 테니까. 잘 있어. 열이 나고 관자놀이가 뛰고 눈이 흐려지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떼어 놓지 못할 거야. 그렇지? 오, 언제, 도대체 언제쯤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언제나 우리는 함께 살 수 있게 되고, 함께 여행할 수 있게 될까?(70쪽)
너의 편지가 내게 준 기쁨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너는 전부터 나의 친구가 아니었니? 지금은 그 이상의 것, 나의 진정한 반쪽이 되지 않았니? 네가 내 영혼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듯이, 나 역시 너의 영혼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게 아닐까? 아,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그것이 얼마나 진실되고 강력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어!(71쪽)
방 안에 가구라고는 침대 둘, 의자 하나, 그리고 세면기 하나뿐이었다. 방 안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서로 보는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생각에 똑같이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졸음이 싹 달아나 버릴 정도였다. (중략) 다니엘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구두끈을 풀었다. 자크도 그대로 했다. 마침내 다니엘이 결심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촛불을 훅 불어 껐다. “그럼, 불 끈다……. 잘 자.” 그리고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른 자리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87~88쪽)
“너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어! 이젠 그런 구박은 지긋지긋해! 끝장이야!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를, 우리도 저들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 주기만 해 봐. (중략) 우리들은 생사를 같이할 친구니까 우리가 계속 친구로 지내겠으며 자유롭게 지내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거야!” 그는 입을 다물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아주 침착한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못한다면, 전에도 말했지만, 난 죽어 버릴 거야.”(95쪽)
“난 너무 지쳤어요.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봐 달라는 것뿐이에요. 그러면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른 어떤 해결책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거예요. 우리가 같이 산다는 건…….” 부인은 말을 이었다. “……우리가 같이 사는 생활에서 아직 남아 있는 것,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그 알량한 것, 제롬, 이젠 난 못 견디겠어요.” 그녀는 몸이 굳어졌다. 그녀는 두 손을 벽난로의 대리석 위에 얹고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몸짓과 손짓으로 강조하며 끊어 말했다. “난— 이젠— 싫어요.”(142~143쪽)
친구여,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친구, 내 삶의 사랑이며 아름다움인 벗이여!
나는 너에게 이 글을 유언으로 쓴다.
그들은 나를 너에게서 떼어놓고,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 놓고, 지금 나를 어떤 곳에 처넣으려고 해. 그곳이 어디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는 너에게 말할 용기조차 없어. 나의 아버지가 부끄러워!
나는 너를, 나의 유일한 친구이며 나를 선량하게 만들수 있는 오직 단 하나의 친구인 너를, 다시는 못 만나게 될 것 같구나.
안녕, 친구여, 안녕! (160~1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