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가족이라는 고통스러운 운명과
그 운명을 부수는 새로운 가족
경장편 소설의 시작을 열었던 2009년 화제작,
가벼운 판형과 감각적인 표지의 개정판 출간
편집자 리뷰
2009년, 민음 경장편의 시작을 알렸던 김이설 장편소설 『나쁜 피』가 새로운 옷을 입은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태동이라 할 수 있는 김이설의 대표작이자 화제작을 보다 가벼워진 판형과 감각적인 표지로 독자에게 다시 선보인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성을 잃지 않는 서사, 공고한 가부장제에서의 가족의 의미와 한계를 묻고, 그 너머를 꿈꾸는 소설 『나쁜 피』를 한국문학 독자 모두가 다시 발견해 주기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 핏줄, 젠더, 가부장을 넘어
김이설의 첫 단행본 『나쁜 피』는 과거 한국 문학이 그려 온 전통적인 가족의 단상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가족이 어떤 의미를 함의하는지 진지하게 조명하고 모색한 놀랍도록 신선한 작품이다. 증오라는 나쁜 피를 타고난 한 여자가 그 피를 흘려보내고 새로운 가족을 발견하기까지의 지난한 겨울. 모든 불행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더욱 위악적인 여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피할 수 없는 매력은 바로 누구나 타고나는 가족이라는 운명에 대한 지독하게 솔직한 대답에 있다.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다시 가족이다. 결핍을 타고난 여자 화숙, 미완의 모성을 품은 여자 진순, 부모와 함께 언어를 잃은 소녀 혜주. 이 세 명의 여자가 이루는 인공 가족의 모습에서 우리는 핏줄과 성과 가부장을 넘어서서 새롭게 구축되어 가는 21세기형 가족의 모습을 본다.
■ 여전히 새로운, 여전히 강렬한 이야기
그런 김이설이 『나쁜 피』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선택지에서 뭔가에 홀린 듯 최악의 답을 선택해 나가는 하층민 여자의,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다. 폭력적인 외삼촌과 알코올중독자 할머니, 불륜으로 병든 외사촌과 함께 수많은 절망을 겪으며 고물상 동네에서 살아가는 그녀가 메마른 어조로 토로하는 가족이라는 운명적인 절망은 문득 몸서리칠 만큼 위악적이고 순수하게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모든 운명이 지나간 뒤, 주인공 화숙이 햇빛 비치는 겨울의 끝자락에 이르러 가족을 넘어선 새로운 가족을 발견하는 마지막 순간, 우리는 이전의 절망이 지극히 깊었기에 더욱 숨 막힐 듯 다가오는 삶의 향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증류되지도 휘발되지도 않은 짙은 삶의 날 향이 바로 김이설의 작품이 발하는 체취이다.
■ 추천의 말
운명이라고 하는 고통으로 먹이사슬처럼 연결된 인간관계 가운데 김이설은 새로운 인공 가족을 탄생시킴으로써 ‘나쁜 피’를 희석시킨다. 그녀는 ‘성격은 곧 운명’이라는 주제를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다.
-김미현(문학평론가)
■ 책 속에서
혜주가 온 건 다음 날이었다. 방문을 여니 할머니가 밥을 먹이고 있었다. 상에는 물 만 밥에 부스러기 김, 참치 캔이 하나 있었다. 나를 본 혜주가 벌떡 일어나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아가. 울지 마라. 아가, 아가.”
할머니가 등을 쓸었지만 달랠수록 울음소리가 커졌다. 아이고, 아가.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혜주의 울음소리보다 할머니의 탄식이 더 듣기 싫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끄러, 다들 입 좀 다물어 봐!”
혜주가 더 크게 울어 댔다.
“네 엄마 닮았어? 왜 자꾸 울어.”
-19쪽
“나는 겨우 열두 살이었어.”
“그건 수연이도 마찬가지였어.”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죽도록 맞고 돌아오더니, 며칠 뒤에는 아예 사라져 버렸어. 남은 식구들은 길바닥에 내쫓겨야 했고. 아버지가 정말 부정한 짓을 했다면 억울하지도 않아. 수연이 어머니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면 나도 수연이에게 다가가지 않았을 거야.”
나는 멈칫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같이 사라졌잖아.”
-133쪽
“다녀오셨어요.”
안채로 들어서자 혜주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색연필을 쥐고 있던 혜주가 다시 바닥에 엎드려 발을 까닥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여자 셋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구석에는 세모 지붕의 집 한 채, 하늘에는 노란 해가 떠 있었다. 뛰어왔어 내 몸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했다. 진순이 깨끗한 수건으로 내 이마를 닦아 주었다.
“밥 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95쪽
목차
천변 어귀 7
고리 59
겨울 황사 149
작가의 말 196
작품 해설 – 백지은 199
이설(異說)의 현실, 현실의 이설
작가 소개
독자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