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눈으로 사람을 보고
겸허한 귀로 자연을 듣는
이토록 순수한 서정시의 황홀
삶을 대하는 진솔한 시선과 아름다운 우리말로 서정시를 노래해 온 허형만 시인의 신작 시집 『황홀』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집에 수록된 77편의 서정시에는 삶이 주는 기쁨과 경이로움뿐만 아니라 가끔씩 찾아오는 쓸쓸함과 비애가 겸허하게 담겨 있다. 치장하지 않고, 왜곡하지 않은 삶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시의 용광로에서 달군 순수한 낱말들은 시집 곳곳에서 반질반질하게 빛을 발한다. “그리매”, “명지바람”, “어둑새벽” 같은 우리말들이 환기시키는 정서는 이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귀한 것이 되었다. 그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처럼 『황홀』에는 이제 허형만 시인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말맛으로 가득하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의 산문과도 만날 수 있다. 197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45년간 시 쓰기를 멈추지 않은 시인은 책 끝머리에서 문학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정시는 곧 언어의 본질에 가닿은 가장 순도 높고 깨끗한 생명체라고 말하는 시인은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 그 말을 증명해 낸다. 『황홀』은 작품에서부터 창작론까지 허형만 시인 그 자체를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시집이다.
■낯선 땅에서 기록한 시의 순례
미얀마에서는 파고다에 들어설 때마다
신발을 벗어야 한다
미얀마에서는 부처님 앞에서
맨발이어야 한다
맨발처럼 가장 낮은 마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지상의 고독, 지상의 슬픔도
모두 맨발보다 더 위에 떠도는 것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공처럼 구부려야
따가운 지상과 입 맞추는 맨발이 보이느니
맨발은 자신이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존재임을 안다
―「맨발」에서
우리나라의 자연을 향토적인 서정으로 노래해 온 허형만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쓴 시들을 한데 모았다. 시인은 티베트와 미얀마, 중국과 일본, 미국을 넘나들며 이국적인 풍경에서 자신만의 서정을 발견해 나간다. 미얀마의 파고다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맨발처럼 낮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채 무너져 내리는 쉐 인 테인 유적지를 바라보며 고독함과 적막을 그린다. “여행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격언을 증명하듯 허형만 시인의 시는 이국의 풍경에 속한 모든 사물과 존재에 경의를 표한다.
■시와 일상의 끊임없는 순환
시의 첫 언어를 찾아가듯
늘 걷는 길 처음인 양 새롭고
어제 본 저 반짝이는 솔빛도
깊은 기다림처럼 새롭다
새롭다는 건 심장을 뛰게 하는 거
아, 늘 보아도 지치지 않는
한 줄의 시처럼
―「솔빛」에서
허형만 시인의 시는 일상에서 시작해 일상에서 끝난다. 일상에서 시를 발견하고, 다시 시를 통해 삶을 깨닫는 선순환은 정제된 서정시의 미학을 완성시킨다. 손자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책 읽는 소리에서 다시 말을 배우고, 이삿짐을 정리하다 발견한 녹슨 메달을 보며 자신의 시를 생각한다. 언어를 비틀지 않고, 말수를 아끼며, 시의 순수한 근원에 닿기 위한 시인의 노력은 삶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다. 시의 역할이 사물의 본질을 관통하는 것이라면, 허형만 시인은 다정한 시선으로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는 순수한 생명의 진실을 사물에서 길어 올린다. 허형만 시인은 시를 통해 우리의 일상이 아름답고 충만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인의 글에서
시인이 다루는 언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생명체다. 이처럼 깨끗하게 숨 쉬는 생명을 ‘낯설게하기’라는 이름으로 이리 비틀고 저리 비트는 잔혹한 일을 나는 할 줄 모른다. 선천적인 태생이 촌놈이라서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순도 높은 언어 그 본질 자체를 시의 용광로에서 달구고자 한다. 마침내 황홀하게 빛을 발하는 언어의 숨결을 상상하면서.
■본문에서
세상의 풍경은 모두 황홀하다
햇살이 노랗게 물든 유채꽃밭이며
유채꽃 속에 온몸을 들이미는 벌들까지
황홀하다 더불어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내가 다가가는 사람이나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모두
미치게 황홀하다 때로는 눈빛이 마주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오, 황홀한 세상이여 황홀한 세상의 풍경이여 심장 뜨거운 은총이여
―「황홀」달은 나무의 꿈들이 언제 어느 방향으로 뻗어 나갈지 잔뜩 긴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무도 가던 길을 멈추고 지금 그 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아
달의 촉수를 두려워하다가 그리워하다가 부르르 온몸을 떨며 파동을 일으키며 달을 향해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신명 나는 꿈을 꾸는 것이다
―「달과 나무」에서나이아가라 앞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온몸이 하얗게 질린 자작나무였던가
삭풍의 칼바람을 베며 솟구쳐 오르는
독수리 바람칼이었던가
아무튼 나는 어찌하여
인디언의 서늘한 휘파람처럼
국경을 너무 쉽게 통과했던가
―「아무튼 나는」에서무량, 무량으로 쌓이는
저, 그늘
고봉으로 들이켰음 좋겠다
사랑이여, 저 그늘 같은 서늘한 사랑이여
나의 마음이 저만큼 비어
저만큼 넉넉하지 않아도 좋겠다
―「저, 그늘」에서
■목차
1부
주름에 관한 보고서
그 무렵
번짐과 스밈
황홀
수첩
기억의 회로
침묵의 정원에서
절집에서
혀
난해한 시 읽기
한 소식 듣는다
첫눈
푸른 냉장고
상가에서
달과 나무
2부
만개
아무튼 나는
실리나스를 지나간다
외로운 소나무
주일 아침
파피꽃
양귀비꽃
야나가와 1
부레옥잠
다이아몬드꽃
쉐 인 테인 유적지에서
수상 마을
이라와디강
후쿠오카의 아침
동갑
맨발
야나가와 2
풍경
3부
별들이 노숙자처럼
무슨 진리를 찾아 들어가듯
신성한 바람이
화접(花接)
솔빛
씨앗
응시
느티나무
고라니를 만나다
오, 장엄
겨울 자작나무 숲
오, 화엄
촛불이 들불처럼 타올라
소리들
평창
고양이
시마(詩魔)야 놀자
저, 그늘
지리산 구절초
독도
밥
녹슨 메달
평화의 소녀
구파발역
촛불
4부
한 생애가 적막해서
그사이
내심무천(內心無喘)
낯선 풍경
말씀
생오지
그리움
석양
율동 공원
의자
뼈는 귀도 밝다
발을 씻겨 준다
보인다는 것
단계(丹桂)
새해의 기도
향기
오월 햇살
휘추리
부활
시인의 글
나의 삶, 나의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