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라틴아메리카 저항 예술의 핵심 개념인 식인주의와 카니발리즘에 대한 흥미로운 탐사 여행
부제: 서구의 야만 신화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유쾌한 응수
글 임호준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7년 11월 30일
ISBN: 978-89-374-8508-4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35x220 · 272쪽
가격: 22,000원
분야 서울대 인문 강의
오랫동안 이성중심주의의 유럽 작가들은 자랑스러운 일방통행식 헬라어의 특권적 마스터를 자처해 왔으나, 20세기 후반 이래, 식인주의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카니발적 예술이 세계 문학과 예술의 전위에 섰다. 지구 위의 다성적이고 다자극적인 새롭고 상이한 과육을 먹어야 한다는 식인주의는 1920년대 브라질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한 것이지만 이후 브라질 문화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정체성 담론과 문화적 논의에도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식인주의가 지지하는 다중의 정체성 또는 정체성의 카니발화는 세계화 시대의 문화 정체성 논의에 이상적인 모델을 제공한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의 식인주의와 카니발리즘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한 지역의 예술 사조 연구를 넘어 다성적인 현대 예술의 특징을 검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들어가는 말
서론
1장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과 식인 신화
유럽의 오리엔탈리즘과 결부된 식인
카리브해 식인 풍습에 대한 서양의 인식과 재현
투피족의 식인 풍습에 대한 서양의 인식과 재현
아스테카, 마야 문명의 인신 공양 풍습과 식인에 대한 서양의 인식과 재현
2장 라틴아메리카의 카니발 문화와 식인주의 운동
식인주의 운동의 배경: ‘카니발’과 라틴아메리카 문화
브라질 모데르니스모와 ‘식인주의 선언’
문학적 ‘식인주의 선언’: 『마쿠나이마』
식인주의 운동과 브라질 민중 음악
/더 살펴보기 1/ 오스바우지 지 안드라지
/더 살펴보기 2/ 마리우 지 안드라지
/더 살펴보기 3/ 질베르투 프레이리
3장 현대 라틴아메리카 문화와 식인주의
‘열대주의’ 운동과 브라질 민중 음악의 발전
시네마 노부와 식인주의
현대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식인주의
/더 살펴보기 1/ 카에타누 벨로주
/더 살펴보기 2/ 질베르투 질
주석
참고 문헌
■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의 구실이 된 식인 신화
‘식인(cannibalism)’과 ‘카니발(carnival)’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들로서, 두 단어는 같은 패러다임 속에 놓여 있다. 서양 문화에서 오래된 ‘축제’로서의 카니발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이해한다면 ‘식인’이야말로 카니발의 정신을 온전하게 나타내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카니발이 물질적·육체적인 하위 원리를 바탕으로 고립된 개인을 타인과 연결해 주고 대지, 더 나아가 우주와 소통하게 하는 것이라면 ‘식인’은 사람의 몸과 몸의 연결성을 극적으로 표상하는 행위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속에서 식인은 단순히 인류학적 논의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식인 행위의 카니발적 함의는 더욱 커진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아메리카를 식민화할 기회를 갖게 된 스페인과 유럽 열강은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하고 노예화하면서 이를 정당화할 구실로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낙인찍는다. 즉 아메리카 원주민은 야만인이므로 이에 대한 착취와 지배는 정당하다는 것인데 이러한 야만인 담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식인 풍습이었다.
■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키워드, ‘식인’과 ‘축제’
유럽인들이 유포한 식인 전설에 대한 라틴아메리카 지성인들의 대응은 지극히 카니발(carnival)적이었다. 식인 풍습이 있었느니 없었느니 다투는 대신 오히려 식인을 축하하고 기념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삼은 것이다. 식인주의는 무엇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개념이다. “내 프랑스인은 얼마나 맛있었나”라는 조아킴 지 안드라지의 풍자적인 제목처럼 유럽인들은 라틴아메리카 지성인들에게 맛있는 먹잇감이다. 그들의 발달된 기계 문명, 세련된 문화는 흡입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부장적, 억압적인 문화, 기독교의 위선, 과도한 형식주의는 배설의 대상이다. 유럽의 문물에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문물을 능동적으로 골라서 먹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식인은 브라질의 문화 정체성을 만드는 핵심 개념이 됐다.
유럽의 카니발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거나 반종교적인 먼 옛날의 광란 상태를 활력 없이 흉내 낸 것에 불과하지만, 아프리카 노예들이 가져온 문화를 흡수한 남미 국가들에서의 카니발은 생명력 있고 활기찬 전통이다. 철저한 메스티소 문화(원주민,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미 대륙 문화가 뒤섞인 문화)는 대단히 창의적인 한 문화 현상을 낳게 했다. “노래하고 춤추는 군중들이 주신의 영향 아래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소용돌이쳐 몰려다니는 동안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게 되는” 무아지경의 디오니소스 축제는 카리브 해안의 일부 지역, 그리고 사우바도르 혹은 헤시피 같은 브라질 도시에서 온전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렇게 실제로 유토피아적인 카니발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예술이나 문학이 풍성한 카니발적 상상력을 입은 것은 당연하다. 유럽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라블레,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강렬한 흔적을 남긴 카니발 문학은 이후 유럽에선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대중적인 카니발 의식과 고급문화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그 풍부함을 유지해 왔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카니발 예술과 문화 운동으로서의 식인주의는 매우 방대한 주제이다. 1920년대 브라질 모더니즘과 1960년대의 트로피칼리아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식인주의는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현대 담론들과 연결되어 있다. 수많은 라틴아메리카 문학, 예술, 음악, 영화 작품들이 식인주의, 더 나아가 카니발리즘의 자장 속에 있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정복을 위한 야만의 징표로 억지로 갖다 붙인 식인 풍습이 어떻게 브라질 예술인들에 의해 정체성 담론의 중심적인 메타포가 되었고 이후 카니발적 패러다임 아래에서 브라질과 라틴아메리카 저항 예술의 핵심 개념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 이 책은 남미 문화로의 흥미로운 탐사 여행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식인주의는 1920년대 브라질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한 것이지만 이후 브라질 문화 담론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며 현재까지도 브라질 문화에 중요한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정체성 담론과 문화적 논의에도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식인주의가 지지하는 다중의 정체성 또는 정체성의 카니발화는 세계화 시대의 문화 정체성 논의에 이상적인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브라질 문학계의 지성이자 시인인 아롤두 지 캄푸스는 지구상의 어떤 문학도 외부의 기여를 통해 새로워지고 활기를 받지 못하면 시시해지고 만다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며, 오랫동안 이성중심주의의 유럽 작가들은 자랑스러운 일방통행식 헬라어의 특권적 마스터로서 자신들을 상상해 왔지만 이제는 지구 위의 다성적이고 다자극적인 새로운 야만인들의 상이한 과육을 인정하고 집어먹어야 할 점점 긴급해지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한다.
식인주의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카니발적 예술이 20세기 후반 이래로 세계 문학과 예술의 전위에 서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의 식인주의와 카니발리즘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한 지역의 예술 사조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를 넘어 다성적인 현대 예술의 특징을 검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