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심 2
파리의 조선 궁녀
시리즈 소설 조선왕조실록 14 | 분야 한국 문학
구한말, 격동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운명을 타고난 한 여인의 표류기
낯선 이국땅도 사랑 앞에서는 두렵지 않다
가장 낮은 신분으로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갔던
조선의 궁중 무희, 리심
아무것도 그녀를 옭아매지 못했다
김탁환의 역사소설 중 가장 방대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리심』이 민음사의 ‘소설 조선왕조실록 시리즈’로 다시 출간되었다. 2006년 《세계의 문학》에서 연재된 뒤 단행본으로 묶인 『리심』이 11년 만에 새 옷을 입은 것이다. ‘소설 조선왕조실록 시리즈’로는 2015년 『목격자들』이 출간된 이후 2년 만이다.
『리심』은 격동하는 19세기, 세계열강 사이에서 위태로운 조선을 배경으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주어진 운명에 저항했던 한 여인의 삶을 그려 낸다. 리심은 조선의 2대 프랑스 공사인 이폴리트 프랑댕의 『한국에서(En Corée)』에 언급된 인물로 초대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과 사랑에 빠졌던 궁중 무희라고 전해진다. 그녀는 1893년 5월 빅토르 콜랭과 함께 파리로 건너가 조선 여성 최초로 유럽 땅을 밟았고, 1894년 10월에는 모로코로 건너가 역시 조선 여성 최초로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김탁환은 『한국에서(En Corée)』에 나온 한 문장으로 이 방대한 스토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리심은 자신이 관찰한 놀라운 서양 문물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기록해 두었는데, 나는 언젠가 그 기록들을 꼭 출판하려고 다짐하고 있다.”
리심은 조선에서 나고 자랐지만 파리로 건너가 신문물을 흡수하고 체화한 ‘신여성’ 그 자체다. 프랑스인보다 더 자유와 평등, 박애의 영혼을 지닌 리심은 신분과 국적, 인종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간다. 『리심』과 함께 복간된 『나, 황진이』,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모두 여성 인물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소설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의 ‘여성 3부작’으로 명명할 수 있다. 『리심』은 그 3부작 중에서도 명실공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서사를 품었다.
개정판 『리심』에는 초판부터 김탁환에게 프랑스 문화사에 관해 많은 도움을 준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정지용 교수의 해설이 추가되었다. 정지용 교수는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프랑스어 검수를 자청하며 개정판의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리심, 배꽃의 마음
리심에 대한 기록은 이폴리트 프랑댕의 『한국에서』가 전부다. 하지만 김탁환은 얼마 안 되는 그 글을 단서로 그녀의 인생을 세밀하게 묘사해 낸다. 오직 김탁환만이 쓸 수 있는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이번 작품에서도 진면목을 발휘한다. 김탁환의 손에서 리심은 미천한 태생이지만 자신의 신분에 체념하지 않고 향상심과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매력적인 인물로 다시 태어났다. 유연한 사고방식과 열린 마음으로 무엇이든 재빠르게 흡수하는 리심은 새로운 환경에 맞춰 적응하고 성장한다. 리심의 긴 여정을 따라 읽은 독자들이라면 그녀의 성장을 눈에 띄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배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는 것처럼 그녀의 개화는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조선과 일본, 프랑스에서 탕헤르까지
『리심』은 김탁환의 다른 역사 소설과는 달리, 도쿄, 파리, 아프리카의 탕헤르까지 어우른다. 평소에 다루던 시대와 장소가 아님에도, 탁월한 이야기꾼 김탁환은 변함없이 능수능란한 면모를 보이며 보다 확장된 세계에 맞춘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신분과 국적을 막론한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향연에는 ‘팩션(faction)’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역사 속 인물들 역시 포함되어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만이 아닌, 홍종우와 김옥균 같은 근대의 문제적 인물들은 김탁환의 이야기 속에서 입체적 인물로 그려지며 이야기에 맛을 더한다.
■국적을 뛰어넘은 비극적 사랑
『리심』은 한 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동시에 리심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비천한 신분으로 박해받으며 자란 어린 소녀가 우연과 인연이 얽히고설켜 프랑스의 초대 공사와 사랑에 빠진다. 궁에 속한 무희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라나서고 싶다는 욕망에서부터 리심의 삶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탁환은 리심과 프랑스의 공사 빅토르 콜랭의 사랑 이야기를 마냥 낭만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리심은 세계와 마주하고, 견문을 넓히면서 사랑만을 생각하는 외곬수가 아닌 성숙한 인간으로서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변치 않을 사랑에는 위기가 찾아오지만, 리심은 사랑과 자신의 존엄성을 모두 지키기 위한 결단을 내린다. 리심의 곁에는 언제나 남편인 빅토르 콜랭이 자리하지만, 그녀는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한 명의 여성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줄거리
조선 말, 프랑스 외교관과 사랑에 빠졌던 조선의 궁중 무희 ‘리심’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관기에서 의녀로, 의녀에서 다시 궁중 무희로 변모하는 리심은 한때 고종과 동침하는 사이였지만 프랑스 외교관과 결혼하여 궁을 떠나게 된다. 이후,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그녀는 프랑스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안고 다시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궁중 무희였던 그녀는 조선에서 이전의 자유로운 신분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 궁으로 잡혀 들어간다. 강제로 참석하여 춤을 추게 된 연회에서 리심은 혼신을 다해 마지막 춤을 춘다.
■책 속에서
“천천히! 천천히, 첫눈 밟듯 가 줘요!”
조선에서 데려온 이 고운 아내를 위해서라면, 빅토르 콜랭은 자신의 생애 전체를 느리디느린 걸음 하나에 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야기 속도를 늦추면서 아내 리심이 잠들 때까지, 아내의 아미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면서 이야기를 잇고 또 이었다.―1권 10쪽“단지 법국 외교관의 아내가 되어 법국인으로 살아가겠다면 널 보낼 까닭이 없느니라. 공사와 네 사랑을 내가 도울 이유는 더더욱 없지. 리심아! 너라면 내 뜻을 헤아릴 것이라고 믿는다. 몇 해 전 홍종우도 법국으로 떠났지만 감감무소식이로구나. 구라파인들은 속속 조선으로 들어와서 조선의 모든 것을 먹고 보고 익히는데, 우리는 저들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네가 구라파로 뻗은 내 눈과 귀가 되어 주지 않으련?” ―1권 314쪽
힘들어하면서도 그들은 다음부터 조금씩 조선 춤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기꺼이 그들의 춤 선생이 되기로 했다. 조선을 떠나면서 다시는 춤을 출 기회가 없으리라 여겼는데, 춤과 나의 인연은 동아줄보다 질기고도 질긴가 보다. 어머니는 이걸 팔자라고 하셨지. 기생 팔자, 어디 가겠느냐고. ―2권 156쪽
나는 누구인가. 조선에서 태어난 기생, 의술을 익히고 춤을 배운 궁중 무희, 몇몇 프랑스인들은 검은 아프리카인들과 나를 함께 무대에 세워 구경하고 싶어 했지. 아프리카와 아시아 계집들만 발가벗겨 야릇한 사진을 찍어서 파는 놈들도 있다더군. 아무리 불어를 잘해도, 그네들의 사상과 시문에 깊이 동감해도, 나는 프랑스인이 될 수 없지. 나는 누구인가. 정녕 누구란 말인가. 내 영혼의 얼굴은 조선인일까. 프랑스인일까.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괴물일까. ―2권 269쪽
제물포에 내리는 순간부터 깨닫지 않았느냐? 조선에서 너와 같은 복색을 하고 너와 같은 걸음을 걷는, 너처럼 법국 말과 문화에 능통한 여인은 너 하나뿐이니라. 법국에 있든 조선에 있든 너는 혼자란 걸 명심해야 한다. 외로우냐? 설마 사랑을 믿었던 건 아니겠지? 사랑 안에서 널 속이며 여인의 행복 따윌 빌었던 건 아니겠지? 외로움은 너처럼 특별한 여인에게 내린 하늘의 축복이니라. 나 역시 축복 속에서 살다가 축복 속에서 죽었느니라. ―3권 16쪽
리심, 너는 벌써 새로 나아감[進]을 시작하였다. 마락가까지 가는 길도 너 혼자였듯이 그곳에서부터 돌아오는 걸음걸음도 네가 최초인 것이다. 솔직하게 네 자신에게 물어보아라. 너도 이걸 기대하지 않았느냐? 이것만이 리심의 삶이라고 여기지 않았더냐? 법국에 첫발을 딛던 순간을 떠올려 보아라. 네 그 ‘처음’들을 한 순간도 잊지 마라. ―3권 18쪽
흐트러진 초점이 겨우 하나로 모였다. 그녀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빅토르 콜랭의 뺨을 만졌다. 빅토르 콜랭이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리심의 입술이 떨리며 열렸다. 말을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빅토르 콜랭이 급히 귀를 갖다 댔다. 한 생(生)의 완성과 소멸을 잇는 마지막 호흡이 흘러나왔다.
“……첫눈 밟듯 천천히 들려줘요…… 빅토르…… 천년만년 흘러도 결코 잊지 못할 하루를!” ―3권 320쪽
■작가의 말
『리심』은 개화기 조선 여성의 가능성을 살핀 작품이자, 소설가로서 내 작업의 확장 가능성을 탐색한 작품이기도 하다. 조선, 일본, 프랑스, 모로코로 이어지는 여정도 광대한데, 나는 이 여정을 개화기 조선 여성이 집필한 세계 여행기로 꾸미고 싶었다.
2부 흐를 류(流)
1장 도쿄 1891년 6월~1893년 3월
출항
이진칸의 푸른 연
달려라, 오카조키!
대청소
시노바즈 연못, 입맞춤
로윤가쿠에서 13층을 논하다
적군 혹은 아군
코잔 포도주 두 잔 풀피리 두 곡
우울한 귀국
2장 파리 Ⅰ1893년 5월~1894년 10월
콩셉시옹 병원
미래를 달리는 기차
새장 속으로
모랭과 조선
봉 마르셰 백화점
모랭 부인 살롱에서
시메르와 방상씨
오페라 드 파리
사선무
에펠탑에 오르다
결혼식
불로뉴 숲의 행복
보들레르, 이하 그리고 황진이
루브르에서 보낸 오후
인생은 코미디
아기를 잃다
앵발리드 다리 아래로 흐르는 죽음
선물
기메 박물관, 봄꽃 향기
죽는 자 죽이는 자
우울한 파리
3장 탕헤르 1894년 10월~1895년 12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가다
영혼의 얼굴
춤 그리고 혼돈
노란 마녀
샹젤리제 소동
수낙타 두지
사하라에서 길을 잃다
현자 마리안
다시, 고아가 되다
모로코, 또 다른 조선
4장 파리 Ⅱ 1895년 12월~1896년 3월
내가 여행기를 써야만 하는 이유
파리로 온 미치코
공화국 정신
움직이는 사진, 영화
에트르타 절벽에서 풀피리를 불다
당신은 파리 시민이 아니다
삶은 다시 조선으로!
조선 말, 프랑스 외교관과 사랑에 빠졌던 조선의 궁중 무희 ‘리심’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관기에서 의녀로, 의녀에서 다시 궁중 무희로 변모하는 리심은 한때 고종과 동침하는 사이였지만 프랑스 외교관과 결혼하여 궁을 떠나게 된다. 이후,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그녀는 프랑스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안고 다시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궁중 무희였던 그녀는 조선에서 이전의 자유로운 신분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 궁으로 잡혀 들어간다. 강제로 참석하여 춤을 추게 된 연회에서 리심은 혼신을 다해 마지막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