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하나에 집중하기
꼭 필요한 하나를 발견하기
미니멀리스트 시인 이원이 일상과
예술을 바라보는 ‘최소’의 시선들
25년 동안 시를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시가 내게로 왔다는 말, 시가 가르쳐 주었다는 말, 시와 함께한다는 말……. 시와 시인에 대한 이 익숙한 말들에 담겨 있는 동사들, 그러니까 왔다거나 가르쳐 주었다거나 함께한다는 말들은 ‘나’를 어떤 방향으로 안내하는 걸까? 그리고 그 방향은 시인 아닌 우리의 방향과 얼마나 같고 또 다른 걸까. 이원 시인은 25년차 시인이다. 다섯 권의 시집을 냈고 시집들은 저마다 실험적인 언어와 낯선 이미지들로 익숙한 것을 다시 보게 하고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했다. 차갑고 이지적인 언어로 현대 문명의 비인간화된 풍경을 그려낸 전위적인 언어 예술가. 시인 이원의 이미지다.
한편 인간 이원은 누구보다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다. 이원 시인이 쓰는 모든 안부 글에는 글자 하나하나에도 온도가 담겨 있다. 이토록 모던한 시인이자 이토록 따듯한 인간 이원의 언어주머니에는 어떤 다양한 단어들이 들어 있을까.『최소의 발견』은 시인 이원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이자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며, 예술에 대한 이야기이자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25년 동안 시를 쓰며 알게 된 가장 작은 것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한 발명 노트이자 발견 노트이다.
순간주의자의 생활
『최소의 발견』은 간결하고 심플한 생활 방식에 대한 시인의 예찬론이다. 이원 시인은 순간에만 집중하고 순간만 믿는 순간주의자다. 순간주의자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으로 몸을 확장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에 메어 있으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순간’이라는 뜨겁고 고통스러운 찰나, 시인에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이러한 찰나에만 가능하다. 순간주의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 준 ‘순간’들에 대한 기록. 첫 번째 발견이다.
닿고 있다는 느낌
‘닿다’는 이 산문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 중 하나다. 시를 쓸 때 시인은 어떤 느낌일까. 닿고 있는 느낌이다. 이원 시인은 세상과 닿고 있다는 느낌이 좋아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느낌이 좋아서 멈추지 않고 계속 썼다. 지하철 플랫폼에 앉아 열리고 닫히는 지하철 문을 보며 시를 쓰는 순간, 동굴에서 빠져나오고 동굴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하철을 바라보는 순간, 시인은 시를 통해 순간을 알아채고 순간 안에서 시를 쓴다. 그를 시인으로 만드는, 어떤 닿고 있다는 느낌. 두 번째 발견이다.
깨끗하고 과장 없는
『최소의 발견』은 시인의 시론이자 예술론이기도 하다. 순간주의자인 동시에 최소주의자인 이원 시인은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예술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림, 조각, 사진, 타이포그래피…… 예술은 많고 일상은 예술이다.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따라 그림과 조각과 사진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 안에 누워 있던 예술에 대한 감각들도 깨어난다. 깨끗하고 과장 없는 최소주의의 시선으로 찾아낸 예술 감상기. 세 번째 발견이다.
시인의 사랑
시인은 사랑할 때 어떤 말을 할까? 시인의 촉수는 언제나 언어를 향한다. 그러므로 선배 시인 김춘수의 말투부터 동년배 시인 김행숙의 목소리까지, 존경하는 시인 김혜순에 대한 마음부터 아끼는 후배 김민정 시인에 대한 마음까지, 그가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며 오래도록 생각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원 시인 특유의 언어 묘사로 전달된다. 다정한 관찰기이자 애정 어린 고백록. 네 번째 발견이다. 더 작고 더 많은 발견들이 당신에게 들키려고 숨죽이고 있는 지금, 이원의 발견을 읽으며 우리 각자의 삶을 위한 최소의 발견도 시작될 것이다.
■서문에서
가장 작은 것, 최소를 발견하기까지는 최대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고 나면 최소를 발견하는 시선이 생긴다. 최소의 발견만 하겠다는 자발적 능동성이 생긴다. 이 동선을 겪으면 필요라는 실용적 단어를 동화적 단어로 바꾸는 힘이 생긴다. 최소로 최대를 지탱시키는 마법을 갖게 된다. 최소라는 점이 들어 있어야 최대라는 풍경에 멈추게 된다는, 최대 속에는 이미 최소가 들어 있다는 비밀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므로 최소는 처음 선택이자 마지막 선택이다. 모든 것을 다 버려도 포기 못하는 그 무엇, 그러니까 뛰는 심장이라는 뜻이다.
■본문 발췌
“누군가 다소 진지하게 인생관을 물어 왔을 때 나는, 기회주의자는 아니고 ‘순간주의자’예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너무 먼 시간은 생각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거 보며 살아요, 우리는 언제 사라질지 몰라요,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많이 웃었다. 물론 내 말은 농담조였지만 심정적으로는 진심에 가까웠다.”
“스물 몇 살 때, 시 비슷한 것 하나 쓰면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가방에 넣고 다니며 보고 또 보고 했었다. 카페에서도 보고 버스에서도 보고 자기 전에도 보고 혼자 낄낄거렸다. 스스로 의기양양해져 걸을 때에도 소읍의 불량배처럼 걸었다. 한 가지를 계속하면 더 사무쳐야 하고 더 단순해져야 하고 더 무모해져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할까. 지금부터 다시 그 시간으로 걸어가야겠다. 나는.”
“시를 쓰면, 내가 세상의 어딘가와 닿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어려서부터 내게는 늘 세상이 낯설었다. 내가 바라고 있는 창밖이 낯선 것이 아니라 내 두 다리로 딛고 서 있는 창 안이 낯설었다. 자라 모르는 사람보다는 바로 옆 사람이 더 낯설었다. 세상에 대한 이러한 느낌은 죽음을 겪기 전부터 시작된, 태생적 불안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사람들이 북적대는 세상 속으로 몸을 쑥 집어넣지 못하리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직감했던 것 같다.”
“잘못 떨어진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새벽이 늘어 간다. 창은 그때마다 아직 어둠을 삼키지 못했고 모니터의 흰 땅에서는 커서가 뛴다. 커서를 들여다보다 나는 내 맥박을 짚어 본다. 엇갈려야만 걸을 수 있는 오른발과 왼발처럼 맥박과 커서는 번갈아 뛴다. 간혹 같이 뛸 때도 있으나 커서의 호흡이 내 몸의 것보다 늘 조금 빠르다. 커서와 맥박이 엇갈리는 그곳이 내 언어들이 생겨나 꼼지락거리는 바로 그 지점이다.”
“나는 인간이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이보그다. 나는 단단한 것들, 물기가 없는 것들, 뿌리가 없는 것들 쪽으로 열린다. 그러나 220볼트용으로 개조된 몸을 가지고서도 물렁한 것들, 축축한 것들, 뿌리가 있는 것들에게도 느닷없이 몸이 열린다. 이렇게 두 정체성이 충돌하는 나는 울 수도 없는, 땀을 흘릴 수도 없는 한밤의 검은 거울과 같다. 내 삶과 언어는 인간과 사이보그라는 가파르게 균열된 몸의 경계에 있다.”
“살아오는 내내 눈길이 팔리면 맥락 없이 따라갔으므로 자주 길을 잃었다. 거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숲을 보면 가슴이 뛰는 것은 초록 이전에 나무 이전에 헝클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1부 이제 세상은 월요일, 오후의 시작
오동나무
포로교환
마네킹
한 마리의양
묵언
아리조나 카우보이
시를 쓰면 비명도 날개가 된다
악의 꽃
나는 거리에서 산다
2부 맥박과 커서
순간
용접
속도
근원
시인의 손은 늘 어리둥절해야 한다
닿으면, 꽃
모니터를 새〔鳥〕로 만드는 방법
이미지와 놀다
오토바이, 모터사이클, 바이크
2095년 래퍼 구보 씨의 일일
‘그 꽃의 끝을 본다는 것’
3부 세잔의 방식으로
본다
‘사과’의 탄생
생각하지 않고 먼저 본다
쓰지 않고 먼저 그린다
언어를 지우지 않고 여백을 지운다
세잔의 손
나는 부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방에 앉아 방을 궁금해하다
피 묻힌 손은 보여 주지 않는다
4부 기계가 좋다 무당이 좋다
지하철역
노란집
산 것/살아 있지 않은 것
콩알만 하게/뜨겁게 만져지는 것
언덕
춘수 선생의 ‘꽃’
돌
최소주의
기계-무당 (1)
기계-무당 (2)
5부 격렬한 내부를 가진
오갈피나무와 부용과 코끼리와 앵두밭과-김춘수
김혜순 시/인을 구성하는 23개 또는 2023개의 거울
안상수 날개 사전
김행숙으로부터 김행숙으로까지
‘복자수도원’의 그이, ‘언니 하나님’ 되다-이진명
절벽을 더 높이 세우는 일에 몰두하는, ‘두루미-천남성’ 인간-조용미
사막에서 강영숙을 만나다
하드보일드-수도승-김경욱
이만하면 괜찮다, 시 하는 일-김사인
친구들이 가는 방향의 어딘가에서-세 편의 축사
네 개의 몸 또는 네 개의 이미지-오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