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재영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7년 4월 21일
ISBN: 978-89-374-3410-5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8x198 · 296쪽
가격: 12,000원
“여기엔…… 세계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세계입니다.”
운명으로부터 도주하던 이들을 비추는
망원경 같은 시선, 만화경 같은 이야기
하바롭스크의 밤
만화경
똥
네 개의 눈
팸
타워
아주 작은 세계
Keep going
작가의 말
작품 해설: 더 작은 세계를 위하여(박혜진)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소설가 유재영의 첫 소설집 『하바롭스크의 밤』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하바롭스크’라는 지명처럼, 소설집은 낯설고 거대한 숲(세계)을 멀찍이서 조망하고, 그 속에 서 있는 각각의 침엽수(개인)를 밀착하여 조명한다. 숲이라는 현실 세계에 갇힌 개인의 욕망과 충동을 젊은 작가 유재영은 남다른 스케일과 이종적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삶의 비의와 장르적 디테일이 혼종된 이야기의 숲에, 당신의 감각을 초대한다.
■먼 곳의 이야기를 비추는 망원경
『하바롭스크의 밤』의 스케일은 남다르다. 한국을 교집합으로 하여 적도, 러시아, 필리핀, 아이슬란드 등 전방위로 뻗어 간다. 작가는 마치 이야기를 찾아 초점이 맞춰지는 망원경을 지닌 듯하다. 이 망원경에 포착되는 낯선 장소에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겹쳐지며 현실의 폭을 확장하는 소설적 공간이 탄생한다. 표제작 「하바롭스크의 밤」은 자신의 운명을 이고 러시아 하바롭스크 벌목장에 흘러든 두 남자의 탈출기로, 그들의 운명이 형상화된 것 같은 ‘늑대의 늪’이라는 기묘한 분위기의 숲이 등장한다. 「네 개의 눈」은 한국 교회의 부패와 부정을 피해 필리핀 마닐라로 이주한 젊은 목사를 향한 복수극으로 머나먼 두 나라 사이를 잇는 악행의 지도를 그려 낸다. 기존 사회에서 밀려나거나 도망쳐 온 이들이 도착하는 곳은 이전 세계와 단절된 장소이지만, 곧 인물들의 운명을 함께 뒤집어쓰거나 운명의 공기에 전염되어 연결된 장소가 되어 버린다. 이처럼 유재영은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서로 다른 시공간과 이야기를 탁월하게 중첩시킨다.
■이야기를 쪼개 이야기로 만드는 만화경
유재영은 이야기를 멀리 보낼 뿐만 아니라 깊이 파고드는 것에도 능하다. 작가가 자신에게 무수히 던졌을 질문은 마술적, 공상과학적 디테일을 덧입으며 소설로 변모한다. 수록작 「만화경」은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고골, 체호프, 고리키가 써낸 걸작들이 만화경에 의해 쓰여졌다는 일화를 소설로 쓰는 한국의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다. 「Keep going」에는 대신 소설을 써 주는 ‘언더라이터’라는 워드 프로그램이 등장한다. 한국의 신인 작가 ‘박인성’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테드 권’의 태블릿 피시를 훔치고 ‘언더라이터’로 쓰여진 소설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소설 쓰기에 관한 두 소설은 작가적 욕망과 판타지를 담고 있는 동시에 쓰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보여 준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까?” 「Keep going」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던지는 이 의미심장한 질문은 유재영의 첫 소설 세계를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작품 소개
▶하바롭스크의 밤
러시아로 팔려 간 북한 출신 벌목꾼 ‘기’와 한국에서 살인죄로 복역을 마친 뒤 또다시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하바롭스크까지 흘러 온 ‘율’. 기는 탈북한 동생들을 만나기 위해, 율은 악몽과 불면이 반복되는 저주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목소를 빠져나가기로 한다. 비슷한 운명을 공유한 두 남자의 탈출기.▶만화경
19세기 러시아의 문학계, 걸출한 작가 고골, 체호프, 고리키를 탄생시킨 것은 사실 문장을 보여 주는 만화경이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21세기 한국의 젊은 소설가의 소설로 탄생하는데……. 소설은 누가 쓰는가? 내가 쓴 문장이 과연 내 것인가? 이 시선은 어디서 왔는가? 문학사적 작가와 동시대 작가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드러나는 글쓰기에 대한 불안과 욕망.▶똥
시청률이 바닥인 리얼리티 짝짓기 프로그램을 연출하던 김 피디는 ‘돌싱 특집’이라는 아이템을 기획한다. 야외 촬영에 들어간 날, 사라진 남성 출연자를 찾아 헤매다가 그가 죽어 있는 현장을 발견하게 된다. 화제가 될지도 모를 기획이 살인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던 김 피디는 연출부와 함께 시체를 매장하기로 한다.▶네 개의 눈
무성시의 노숙자와 노동자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눠 주며 마치 예수처럼 나타난 ‘권 목사’. 그는 곧 작은 교회를 일으키고 주민들의 신임을 얻는다. 그러나 교세를 확장하려는 이들의 악행을 목격한 목사는 한국을 떠나고, 교회 측의 지시로 ‘박 대위’가 목사의 행적을 좇는다. 한편 ‘박 대위’가 그를 찾아 나선 데에는 사적 복수의 동기가 도사리고 있는데…….▶팸
혜나와 용대와 함께 그들만의 ‘팸’을 만들고 싶었던 ‘나’는 찜질방에서 휴대폰을 훔쳐 중고로 팔아 전세 보증금을 모은다. 아무리 해도 통장의 액수가 늘지 않아 고민이던 ‘나’는 개코 형이 제안한 범죄에 가담한다. 바로 새로운 버전의 아이폰이 출시되는 날 가게에 잠입해 아이폰 수백 대를 훔치는 것. 그들의 ‘가족 만들기’는 실패일까, 성공일까.▶타워
최고급으로 건설된 타워, 그 첨단의 공간에서 보안 일을 하는 경비원 ‘나’와 규호 씨가 나누는 한밤의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 “유령을 본 적 있습니까?”라는 ‘나’의 질문에 규호 씨는 적도 근처에서 근무할 당시의 일화를 들려준다. 빈틈없고 적막한 타워와 1년 내내 계절이 똑같은 적도의 이미지가 겹치며 ‘나’의 내면이 드러난다.▶아주 작은 세계
생체축소술을 이용해 생태계를 10억 분의 1 크기로 줄여 스노볼 안에서 살기로 한 사람들이 있다. 구드욘센과 그의 아내, 그리고 아이는 현실의 가난과 불합리에서 벗어나 축소세계로의 입주를 택했다. 아내와 아이까지 ‘더 작은 세계’로 이동한 이후 구드욘센의 차례가 되었을 때,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책임자는 사라진다. 유토피아를 꿈꾸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Keep going
신인 소설가인 ‘나’는 우연한 기회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인 테드 권을 만나게 된다. 한밤중 배 위에서 테드 권과 대화를 나누던 ‘나’는 충동적으로 그를 죽이고 사고로 위장한다. 테드의 태블릿 피시를 훔쳐 저장된 소설을 다듬어 발표한 ‘나’는 한국은 물론 해외로 판권이 팔리며 일약 스타가 된다. 그러나 미국에서 발표된 ‘나’의 작품에 표절 의혹이 제기되는데…….
■본문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이 나왔다. 참나무 우듬지의 까마귀 둥지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흔들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바람이 잔잔한 날에도 이곳만큼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네 사람의 옷깃이 바람 방향에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피 냄새가 났다. 이 일대는 늑대의 늪이라는 이름을 갖기 전, 붉은 숲으로 불렸다. 혁명에 실패한 자들이 수십 명씩 이곳으로 끌려와 죽었고 그 이후로 숲의 한가운데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면 붉게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바롭스크의 밤」에서“그 남자가 유령이었군요.” 내가 말했다.
“그 남자는 자살한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록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나눈 대화, 그가 내뿜던 담배 연기, 그가 던진 공을 받아 낸 손목의 느낌만큼은 적어도 진짜입니다.” 야구공을 쥔 규호 씨는 손목을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꺾었다. 공은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가상의 허공으로 던져진 공이 내 앞에 놓였다.
“그날 이후로 저는 달라졌습니다. 사실보다는 느낌이 중요한 세계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타워」에서구드욘센과 덕도 입주를 고려했다. 주택 임대료 상승분을 융통할 수 없다는 게 직접적인 사유였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대화 중에 합일감을 느꼈는데 이 세계에서는 그 감정을 유지하며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더 작은 세계가 그것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믿었다. 구드욘센은 며칠 전 화장실 청소 중 만났던 리처드 박사의 말을 덕에게 전했다. “최소한의 크기로 최대의 행복이라니, 이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아주 작은 세계」에서
■추천의 말
유재영의 소설에서 탈주한 인물들은 대개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무 데도 도착하지 않는 게 더 낫다. 그들이 있는 곳은 누르는 힘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더 작은 세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도 가상도 아니지만 현실이면서 가상인 곳, 말하자면 증강현실 같은 것, 그 어지럽고 무한한 공간이 유재영 소설을 읽는 우리의 감각을 계속해서 확장시킨다. 수많은 현실 앞에서, 이제 책을 덮는 우리에게 탈주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행선지 같은 건 알 게 뭐냐. 어쨌든 도망쳐라, 도망쳐라, 어디까지든.”
-해설에서|박혜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