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음’으로 쓰는 사랑의 속성
‘흰 글씨’로 쓰는 감각의 순례
인간 너머의 세계에서 인간성을 사유하는 철학적이고 감각적인 시 세계로 주목받은 신예 시인 김준현의 첫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이 출간되었다.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에는 ‘인간적인 것’을 밀어 내려는 척력이 흐른다. 김준현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뿌리 깊게 고정되어 있던 언어, 종교, 사랑이라는 가치들을 흔들고 의심한다. 그는 쓰였지만 보이지 않는 흰 글씨로, 합의되고 분류된 존재에 대해 ‘있지만 정말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시를 써 나간다. 인간성에 가 닿기 위해 인간으로부터 가장 먼 곳의 감각을 불러 온다는 점에서 김준현의 시 쓰기는 산책이 아닌 순례에 가깝다.
■가볍게 발생해 무겁게 지속되는 언어 놀이
나는 싫어와 실어를 함께 앓았지 머리카락속의 육, 육, 육을 고기, 고기, 고기로 읽고 싶은 날을 참고 나를 참으며 백팔 배를 해야 해 뱀이 빠져나간 뱀 허물의 수만큼, 평생을 벗을 무엇을
(……)
또 시를 썼니?
나의 시어들, 나의 싫어는 나의 실언은 언제나 나의 시어들
볼일을 보는 개처럼 말야
볼일도 안 보려는 사람들의 얼굴을 말야―「이 시는 육면체로 이루어져 있다」에서
김준현의 비인간적 의식과 감각은 가장 먼저 언어로 향한다. 그는 익숙한 법칙대로 쓰인 단어들을 쪼개고 덧대어 새로운 의미를 증식시킨다. ‘싫어’와 ‘실어’와 ‘실언’과 ‘시어’처럼 닮은 동시에 다른 단어가 지닌 동일성과 이질성을 선연하게 보여 주는 식이다. 이것은 마치 집중하는 부분에 따라 오리로 보이기도 하고 토끼로 보이기도 하는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인접해 있으나 완벽하게 다른 둘을 자유자재로 떼었다 붙이는 김준현의 말놀이는 우연처럼 생겨 필연적으로 남는다. 놀이의 기발함으로 발생해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 사유를 남긴다. 이 발랄하고 지적인 언어 감각은 그의 시를 따라 인간의 감각 바깥을 순례하며 인간을 탐색하는 이들의 걸음에 경쾌한 속도를 붙인다.
■하나이면서 하나이지 않은 둘의 세계
두 갈래로 나뉜 이어폰이
귀와 귀로 이어져 있다귀와 귀가
어긋나는 젓가락처럼 어긋나는 가락처럼
다른 귀와 닮은 귀(……)
속으로 이어지는 두 가지 감정을
하나의 감정으로
믿고 사랑하다가 죽겠다고 말하는 단 하나의 감정―「둘의 음악」에서
하나이면서 하나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쓰기. 이것은 시인이 ‘인간적인 감정’에 대해 부정하며 감정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다. 시집의 2부, ‘둘’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이들은 동일한 기관이지만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양쪽 귀나 이어폰처럼 동시에 같거나 다르게 존재한다. 그는 함께인 것들에 대해 말하지만 함께 있음에도 각각 단독자로서 지닌 차이와 이질성에 주목한다. 둘이지만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의 속성을 거부하며 사랑에 대해 말한다. 김준현이 그려 내는 사랑의 관계는 두 존재가 하나가 되는 융합이 아니라 함께이면서 동시에 각자로 존재하는 공존이다. 언제나 사랑을 의심했던 섬세한 독자들에게, 이 멀고도 가까운 사랑의 속성을 권한다.
■추천의 말
김준현은 검다/희다, 글씨/종이의 대립 쌍으로 비공동체적 ‘둘’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는 마치 건축가처럼, 바둑 기사처럼, 혹은 인공 기계 장치처럼 미학적(인공적) 자기 세계를 만든다. 최근 이러한 감각을 보여 주는 시인을 본 적이 없다. (……) 김준현의 시는 소위 인간적인 것, 휴머니즘적인 가치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인간적 감정, 인간적 감각, 인간적 시선, 인간의 윤리, 인간의 제도에 대한 긍정적 관심이 희박하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공감을 최대한 배제한다. 김준현 특유의 비—인간적 능력은 그의 특이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결정적 미덕으로 작용한다.
임지연 (문학평론가) / 작품 해설에서
■본문에서
묵언도 수행이라면 우리는 태생부터 바람이었을까요, 몇 가지 손짓과
눈빛으로 허공이 따뜻해질 때
고개를 뒤틀다가 꽃이 피었고
침대 시트를 물들이는 노을 맨몸을 드러낸 시신들이
물 밖으로 걸어 나오는 시간―「시간여행자」에서
세계는 두 사람의 것인지도 몰라, 비가 내린 다음 날
세계는 천천히 식어 가고
세계는 겨우 두 글자로도 쓸 수 있지
(……)
이제 우린 둘이다 사람을 자주 바꿔 가면서 나는 둘이 되었다―「음과 악」에서
■차례
1부 육면체
순례자
타자
유리 복습
시간여행자 —수화
세례식
카를교의 여행자
앉을 곳
쓴 것과 쓰는 것
정신과 기록과 몸 —쿠마리 서사
조감도
이 시는 육면체로 이루어져 있다
깃펜
오목(五目)
2부 둘
둘의 언어
0.5
둘의 음악
맑은 날
없다
흰 글씨로 쓰는 것 —1
현실의 일
음과 악 —It’ a wonderful life
12시 내외
나의 알리바이 —묵비권
거식증
수용소
빈디
한 줄의 현악기
시에스타
이끼의 시간
인어의 날
3부 흰 옷을 입은 사람들
나의 무문관
인간의 것
있다
선생
면과 벽
먼 산을 바라보았다
적당한 존재
백색 사원
돌아오는 일요일
낯선 곳
백의
해바라기의 빛
유정란
흰 글씨로 쓰는 것 —2
4부 희생양의 젖을 물고
빛의 외도
신은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것이다
탕자의 서 —적
검은자
연옥의 시 —빅 브라더의 시대가 끝나고
가고 있는 시계
나는 원래 두 사람이었다
탕자의 서 2 —네 번째 달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세계
작품 해설–임지연
인공 언어 제작자, 지구 ― 헵타포드의 비정한 세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