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혜진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7년 1월 20일
ISBN: 978-89-374-0850-2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200쪽
가격: 9,000원
시리즈: 민음의 시 230
분야 민음의 시 230
생사의 음(音)이 불협하는 통증의 교향곡
결석과 암석이 돌팔매질하는 투척의 시학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가겠어”
첫 시집 『질 나쁜 연애』로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관습적 인식을 전복, ‘한국 시의 락 스피릿’이라는 평가와 함께 반항과 불온의 아이콘으로 등극한 문혜진 시인이 신작 『혜성의 냄새』를 출간했다.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검은 표범 여인』 이후 10년 만이다. 길었던 공백만큼이나 음색과 리듬은 더 자유로워졌고 상상의 깊이는 무한해졌다. 우주와 인간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혜성처럼 몸속으로 우주로 바다로 시원으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자유자재로 연장하며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시적 공간으로 축조해 낸다. 돌을 던지는 저항은 여전하되, 지난 시집들이 불온한 것들을 노래하는 락앤롤이었다면 이번 시집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비애를 연주하는 불멸의 교향곡을 연상시킨다. 금관악기, 바이올린, 토카타, 푸가 등 클래식적 오브제와 활, 행성, 돌, 모래, 물 등 자연적 메타포를 통해 생의 고단과 존재의 아이러니를 합주한다. 생사의 음(音)이 불협하는 통증의 교향곡이 시인 문혜진의 화려한 귀환을 알린다.
1부
전복
누군가 내 잠 속을 걷는다
금동아미타불
매의 눈이 고프게
소행성 이카루스가 날아오던 밤
폐어
레드 바이올린
아바나
나의 페름기
통증의 해부학
생의 춤
마더의 칼로
흰비오리
22¾
거미줄
침대에 걸터앉아 우두커니
살구
해변 없는 바다
큰고니가 지나간다
무릎-할머니께
2부
귀면(鬼面)
8분 후의 생
검은 여자
외치
KTX에서
혜성의 냄새
뼈피리
전쟁 포르노
흡혈 박쥐
물뱀
네르발이 지나간 자리
흰올빼미와의 거리
한밤의 포클레인
스피팅코브라식 독설
이빨이 서른두 개였을 때
거북목
물기 어린 말
백야 버스
네펜테스
뿔잔
망상 해수욕장
산세베리아
너구리 한 마리
칸나
철가면을 쓴 해마
0시의 북쪽
3부
아틀란티스 연인
검은 맘바
뇌간
지상의 젖가슴
달항아리
화석이 된 이름 트리옵스
바다의 통증
비단무늬그물뱀
타클라마칸
시간의 잔무늬 거울
카나리아 호날두
로드킬2
튀튀
코스모노트 호텔
주홍빛 손가락
그 여름 나의 박제 정원
경(經)을 태우듯 갱을 빠져 나와
맨드라미
인왕산에서
4부
모래의 시1―돈황
모래의 시2―모래톱
모래의 시3―서귀포
모래의 시4―사막의 독트린
천둥새 아르젠타비스
가면올빼미 우는 밤
그 밤의 와룡교(臥龍橋)
외뿔고래
머리카락 자리
몰이꾼과 저격수
찢어지는 남자, 찢어지는 여자
중력의 해골
하수구를 뚫는 밤
카페 부다
플랫폼
작품 해설 / 허희(문학평론가)
이대로인 채 이대로가 아니게
■칼로, 활로!
“마더의 속살, 칼로, 칼로 열어도 꽉 다문 뻘 힘의 바다조개, 피투성이 그 마더의 칼로 수탉의 목을 치고 메기 머리통을 찍어 우리들을 먹였지 마더의 칼과 피, 마더의 몸에서 내가 처음 내쳐질 때, 계속 머무르고 싶었던 따스하고 둥근 마더의 바다, 우리는 그때부터 칼로, 칼로, 서로를 버티고 벼리며, 피투성이 길 위에 맨발로 서 있네!” -「마더의 칼로」
교통사고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남편의 문란한 사생활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작품으로 승화한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를 모티프로 한 시다. 어머니와 자식(딸)의 관계,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삶이 ‘칼’과 프리다 ‘칼로’ 사이를 오가며 서슬 퍼런 리듬을 만든다. 이외에도 바이올린의 현과 활,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거미줄 등 선(線)들의 상상력을 통해 폭력과 그로 인한 통증을 예민하게 재현한다.
■종양과 행성의 간극
“아이가 친구 얼굴에 돌을 던진 날/ 나의 왼쪽 가슴에서 에베레스트가 자라기 시작했다/ 아홉 개 종양/ 아홉 개 행성/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산맥에 누워/ 나는 찢어진다/ 무한히 팽창되는/ 내 몸의 판게아”-「소행성 이카루스가 날아오던 밤」
부모-자식 관계의 본질을 관통하는 시다. 아이의 존재를 종양의 독립성에, 그 독립성으로 인한 고독을 우주 속 행성의 존재에 비유하며 상상력은 현실 너머로 도약한다.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세포의 자율성에 따라 발육하는 종양처럼 나에게서 비롯되었지만 나와 다른 존재인 아이에 대한 감정은 대륙이 찢어지기 전의 초대륙 ‘판게아’에 비유된다. 거대한 분리로 인한 고통이 재현된다.
■검은 기원
“살의 갱을 뚫고 막 나온 아기가/ 젖을 물자/ 나는 검은 여자가 된다/ 메갈로돈 화석의 검은 이빨/ 검은 손톱과/ 검은 불온/ 검은 아기집을 가진/ 다시 또 검어질 미래의 여자/ 뜯어먹어 날!/ 검은 빵이라도 좋아!/ 까마귀가 될 거야/ 아침부터 울어 대는 재수,/ 재수가 될 거야 (중략) 우리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적에/ 캄브리아기 밤에,/ 다음 봄에,/ 나는 다시 검은 여자가 된다/ 검은 모성과/ 검은 예언,/ 다시 또 검어질 미래의 여자” -「검은 여자」
갱(坑), 화석, 까마귀, 검은 아기집, 검은 모성, 검은 예언……. 검은색 이미지 속으로 검지 않은 이미지들을 빨아들인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밀도가 마치 블랙홀 같은 시다. 색깔을 잃었으므로 언어는 자유롭다. 관습적 색깔에 의해 존재가 결정됐던 관념과 그 관념에 기생했던 개념들도 자유로워진다.
■모래의 형이상학
“밤과 낮이 모두 검거나 흰, 그런 날들이었어 아군이 적군이 되고 적군이 아군이 되어, 서로의 뒤통수에 보이지 않는 살상무기들, 흰 매가 사막 폭풍을 뚫고 지나갔어” -「모래의 시4-사막의 독트린」
4부에서는 4편으로 구성된 「모래의 시」 연작이 눈에 띈다. 그중 「모래의 시4-사막의 독트린」은 모래의 운동성이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시다. 작품 해설을 쓴 허희 평론가에 따르면 밤과 낮의 뒤엉킴, 적과 동지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 참혹한 실제와 숭고한 실재가 한 프레임 안에 들어 있는 광경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 시는 미결정 상태의 정확한 기술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혜성은 “시원의 물질을 고스란히 간직한 코스모스의 화석”(칼 세이건, 앤 드루얀, 『혜성』)으로 평가받는 우주 속의 작은 천체다. 10년 동안 벼린 80편의 시가 수록된 『혜성의 냄새』는 일상에서 경험한 비애와 폭력을 관찰하며 그 비극의 시원을 이루는 물질들을 탐색한다. 이 뜨거운 관찰의 기록이야말로 한국 현대시 속의 작은 천체, 코스모스의 화석이다.
■시인의 말
아직도 나는 하고 싶어.
결석과 암석의 돌팔매질!
■해설에서
지금 없는 것의 있었던 흔적, 당연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의 없었던 자취를 몇 백 년 전 먼저 더듬어 갔던 사람이 바로 햄릿이었다. 그의 존재론적 고뇌와 방법론적 성찰을 문혜진은 『혜성의 냄새』에서 시적으로 전유한다. 몇 백 년이 지나도, 우리의 의도와 기대를 배반하는 인생이란 어쩔 수 없이 비극에 가깝다는 사실이 변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역설의 화법으로 말한다. “나는 뜬눈으로 죽지 않겠다 / 나는 뜬눈으로 죽을 것이다”(「스피팅코브라식 독설」) 그럼으로써 문혜진은 살면서 죽고, 살아 부지하면서 죽어 없어지고,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고, 이대로인 채 이대로가 아니게, 그것이 문제이면서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한다. 가능한 결정의 틀린 상태가 아니라, 불가능한 미결정의 정확한 상태로.
-허희(문학평론가) /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