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문장으로 짜여진 견고한 시의 집
지하에서 지상으로 일순간 약동하는 시의 힘
제3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안태운 『감은 눈이 내 얼굴을』
제3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이 출간되었다.(심사위원 강정, 김언, 이수명.) 2014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안태운 시인의 첫 시집이다. 액체처럼 유연하게 읽히는 문장들과 그 문장으로 짜여진 시집 전체가 지니는 견고함이 상반된 놀라움을 선사하는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은 첫 시부터 마지막 시까지 막힘없이 고요하게 흐르는 물줄기 같다. 문장은 정련되었고 이미지는 선명하며 구성은 빈틈이 없다. 안태운의 시는 수면 위의 잔잔함과 수면 아래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포괄한다. 수면 아래가 궁금해 자꾸만 그 물속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 그것이 시인 안태운이 보여 주는 그의 ‘첫’ 세계다.
■안과 밖을 허무는 ‘무화(無化)로서의 시’
그는 안에 있고 안이 좋고 그러나 안으로 빛이 들면 안개가 새나간다는 심상이 생겨나고 그러니 밖으로 나가자 비는 내리고
(……)
얼굴의 물 안으로
얼굴의 물 밖으로
비는 계속 내리고 물은 차오르고 얼굴은 씻겨나가 이제 보이지 않고—「얼굴의 물」에서
물의 이미지는 안태운 시집 전반에 걸쳐 ‘비’, ‘눈물’, ‘파도’, ‘탕’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난다. ‘비’로 내리는 물은 구분된 경계를 무화(無化)시키는 존재다. ‘안’과 ‘밖’의 경계는 그로 인해 구분지어진 이들에게 자리를 지정한다는 점에서 인식을 고정시키고 안주하도록 만든다. 안태운의 시에서 모든 곳에 내리고 차오르는 비는 ‘나의 현실과 타인의 현실’, ‘내부의 내면세계와 외부의 현실세계’와 같은 구분이 세계에 대한 상투적인 이해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한다. 비는 서 있는 자리에 그어져 있던 경계를 지우고, ‘나’를 다른 자리로 옮겨 놓다가, 결국은 ‘나’마저 지워 버린다. 비에 씻겨 나가 ‘보이지 않는 얼굴’(「얼굴의 물」)은 그 자체로 질문이 된다. 나라고 믿던 내가 지워진 이후, 무엇을 담을 수 있는가. 흐르는 물이 안팎을 허물어 버린 자리에서 이전에 볼 수 없던 생경한 것을 보는 것, 시인은 이 낯설고 불편한 기회를 권한다.
■익숙한 구도를 전복시키는 ‘분열로서의 시’
바라는 사람들 곁에서 네가 낳기로 하고 낳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나는 사람들 곁에 없었다
(……)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이내 그것을 그치고 너를 돌아보고 있다 수를 세면서
너는 낳기로 하고 그러므로 여덟을 낳고 낳은 후 누워서 바라고 있다 너는 내 얼굴을 찾고 있나 그러나 찾지 못했지 나는 사람들이 되어 울고 있었지—「낳고」에서
흐려진 경계 위에 등장하는 안태운 시의 인물들은 서로 자리를 바꾸며 관계를 분열시킨다. ‘너는 내 얼굴을 찾고 있나 그러나 찾지 못했지’(「낳고」) 라는 고백은 ‘너’와 ‘나’의 구도를 가늠하지 못하게 한다. ‘네’가 ‘부서져 나간 자리에 내 몸을 이어 붙인다.’(「원경」)는 진술은 ‘나’와 ‘네’가 일치하는 지경에 이르는 이미지를 보여 준다. 안태운의 시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구도를 전복시키며 묻는다. 나는 누구고, 어디에 있는가. 시 속에서 ‘너’와 ‘내’가 일치한 것과 같이 독자는 시인이 건넨 질문을 제 것처럼 여기게 된다. 읽는 자와 쓰는 자의 자리도 어느덧 희미해지는 것이다. 시인은 지난한 세계에 대한 질문과 함께 새로운 읽기를 가능케 한다. 익숙했던 독서와 일상이 낯설어지는 경험은 두렵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우리는 잔잔했던 내면이 안태운의 시와 접촉하며 일렁이기 시작한 순간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추천의 말
지하에서 지하로 흐르는 물처럼, 언뜻 봐서는 눈에 띄지 않지만 들여다볼수록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문장. (심사평에서)
―김언(시인)근본적인 구조를 전도시키면서 강렬히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런 시 앞에서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해설에서)
―장은정(문학평론가)
■본문에서
「合」
이제 우는 사람은 여기 없고
울었다는 사람만 모여서
너는 얼음을 여기 놓고
다 녹기를
여기 없는 것들과
끝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다 녹기를
팔다리를 집어넣은 네가
「감은 눈으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진다. 보이지 않는 눈앞에서 그러나 내가 만진 것들은 다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내 손을 멈추게 하고 손은 어둠에 익숙해진다. 걷고 난 후의 일들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짚이 타고 있다. 눈 뜨면 꿈과 함께 내쳐졌다.
■차례
1부
얼굴의 물
탕으로
파도가 있는 방
낳고
원경
모습의 흐름
토우
확성의 밤
사로잡혀서
예식
나는 일기를 쓰고 있다
어딘지 흐르고 붉은
미열
이 모든 것이 여름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남은 얼굴로
2부
연안으로
동양
산양
시월
베네수엘라어
모색하는 사람
자재로
없는 개를
원어
동공
合
새
나는 새벽에 대하여 말했을 뿐인데
두 번째 자연
3부
그것에 누가 냄새를 지었나
공백
고원에서
누에
살구로 맛볼 수 있는 건 무엇인지
동면
밤을 몰라보게 되어서
재를 넘어서
옥상으로
피서
문
기르는 얼굴
입국
손쉬운 체조를 하면서
그림자의 사람처럼
우리는 흐르는 자세를
2월의 비
감은 눈으로
작품 해설–장은정 ???
찢는 증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