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7

영조에서 순조까지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6년 10월 12일 | ISBN 978-89-374-1707-8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40x210 · 296쪽 | 가격 15,800원

책소개

영조에서 홍경래의 난까지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사건들

출간과 동시에 역사 분야 1위에 올랐던 『역사저널 그날』의 일곱 번째 권이 출간되었다. 『역사저널 그날』은 매주 주말 저녁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교양 역사 토크쇼 「역사저널 그날」의 재미를 온전히 책으로 담았다.

7권에서는 영조와 정조가 이끈 조선 후기의 부흥과 함께 세도정치로 대표되는 쇠퇴의 시작을 다룬다. 노론의 지원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영조는 소론과 남인의 강경파가 일으킨 반란에 맞서 탕평 정치를 내세운다. 소론 출신인 박문수가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치며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영조가 지원한 덕택이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규장각과 장용영의 설치, 수원 화성의 건설, 신해통공의 시행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했다. 영조와 정조의 치세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운 가운데 성리학적 세계관에 의존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의문에 휩싸인 정조의 사망 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민란이 일어나면서 조선은 쇠락하는 길에 접어들었다.

이 책은 지난한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재미와 깊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토크와 드라마, 사료와 도표로 이어지는 이 책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이 시대를 조망하는 너른 안목과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전하는 재미와 감동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리뷰

▶ 조선에 르네상스가 도래하다

18세기는 변화와 혁명의 시대였다. 영국에서는 굴뚝 연기가 도시를 뒤덮기 시작했고,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이 절대왕정의 숨통을 끊었다. 한편 신대륙에서는 새로운 국가가 독립을 선언하며 탄생했고, 중국에서는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와 건륭제가 청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역사저널 그날 7: 영조에서 순조까지』는 영조와 정조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의 부흥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52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과 탕평 정치로 상징되는 영조의 치세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대대적인 반란에 맞서 싸워야 했으며, 반란을 진압한 뒤에도 정통성에 관한 논란은 내내 영조를 괴롭혔다. 그래서 정파를 초월해 포용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으면서 박문수처럼 뜻을 같이하는 측근들과 함께 균역법 등의 개혁을 추진한 영조의 면모는 더욱 빛이 난다.

개혁 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는 영조의 노선을 이어받아 탕평 정치를 펴는 한편, 주목할 만한 업적을 여럿 남겼다. 그래서 정조 사후에 일어난 정치적 반동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오늘날까지도 정조 독살설이 제기되고, 정조의 행보가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여러 차례 다루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정조가 사망한 후에 시작된 조선의 쇠락이 우리가 근대에 겪어야 했던 고난으로 이어진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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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세도정치의 씨앗을 남기다

“애통하고 애통하다. 이것이 웬일인가? 기억하건대, 지난 경신년에 영고께서 소자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지금 내가 이 신하에게 너를 부탁하노니, 이 신하는 반드시 비도(非道)로 너를 보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알라.’라고 하셨는데, 어제의 일과 같아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김조순이 사망했을 때 순조가 한 말이다. 경신년은 1800년으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해이고, ‘영고’는 순조의 아버지인 정조를 가리키며, ‘이 신하’는 김조순이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죽기 전에 제갈량에게 유선을 부탁한 것처럼, 정조도 죽기 전에 김조순에게 순조를 부탁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는 즉위하는 과정에서 경주 김씨와 풍산 홍씨 등 외척의 방해를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도 순조의 장인이 되기로 정해진 김조순에게 어린 아들의 미래를 부탁했다. 외척의 폐단을 알면서도 외척에게 힘을 실어 준 셈이다.

그렇다면 정조의 믿음대로 김조순은 순조를 올바른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보좌했을까? 김조순이 제갈량과 달랐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김조순을 필두로 한 안동 김씨는 조정을 장악하고 60년에 걸친 세도정치의 막을 열었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제공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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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그날’의 에피소드들

반란에 대처하는 영조의 자세
1728년 무신년, 반란이 일어났다. 100여 년 전에 일어난 이괄의 난 이래 조선 최대의 반란이었다. 반란군이 내세운 명분은 영조가 선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것. 충청도의 이인좌가 이끄는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청주성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격해 왔다. 경상도의 정희량과 전라도의 박필현도 군사를 일으켜 반란에 합류했다.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왕위를 잃을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 위기에 처한 영조가 내놓은 대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암행어사가 아닌 박문수에 관하여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 그 인기는 오늘날까지 남은 많은 설화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박문수가 사실은 암행어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데……. 하지만 역사 속에 기록된 박문수의 실제 모습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 속의 박문수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오로지 백성만을 위했던 박문수. 암행어사라는 이미지에 가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박문수의 참모습을 살펴보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는 것
1735년, 아들이 태어났다. 나이 마흔둘에 얻은 아들. 외아들을 잃은 후 7년 만에 본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극진했다. 태어나자마자 원자 칭호를 주었고, 두 살이 되었을 때는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사랑이 큰 만큼 기대도 컸다. 그리고 아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사랑은 미움으로 변했다. 아버지를 무척 두려워했고, 무예서를 편찬할 정도로 무인 기질을 드러냈으며,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던 문제적 인물, 사도세자를 만나 보자.

정조, 자신만의 길을 가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처음으로 했다는 한마디. 그러나 그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 주목하지 않으면 그 뜻을 왜곡해서 이해하기 쉽다. 정조는 자신이 백부인 효장세자의 종통을 이어받았음을 분명히 하고, 사도세자를 추숭하자고 의논하는 사람에게는 죄를 묻겠다고 엄히 분부한다. 정조라는 왕의 미묘한 처지와 앞으로 펼쳐질 치세의 성격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복수와 탕평이라는 갈림길에 선 정조. 정조는 어떤 길을 선택해 나아갔을까?

금난전권을 아십니까
‘사농공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은 상업을 천시했다. 하지만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법. 농본주의 국가인 조선에서도 시장경제는 더디게나마 성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시대의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들이 있었으니, 바로 시전 상인들. 소상인들을 난전으로 몰며 행패를 부리고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 백성들의 높아지는 원성에 귀를 기울이는 정조. 마침내 조선 경제를 뒤흔들 개혁의 칼날을 빼 든다.

온 백성을 비추고자 하던 달은 지고
왕이 죽었다. 향년 49세, 재위 기간은 24년. 젊지 않은 나이였고,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치세였다.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린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는, 정조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 정조는 정말로 독살당한 것일까?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인가? 정순왕후? 심환지? 정조의 치료 기록, 당대의 소문, 심환지와 주고받은 편지 등을 통해서 정조의 죽음에 관한 모든 의문을 파헤쳐 보자.

안동 김씨의 ‘혼테크’ 성공 전략
“조선은 이씨의 나라가 아니라 김씨의 나라다.” 1802년 10월 16일, 창덕궁에서 순조가 혼례를 올렸다. 왕비의 아버지는 김조순. 19세기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외척이 있었는데, 어째서 유독 안동 김씨만이 세 명의 왕비를 배출하며 60년간이나 조선의 국정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만 세도정치의 전개 과정과 폐해를 살펴보자.

못 살겠다 홍경래
조선과 중국을 잇는 길목인 평안도.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부유한 땅이었다. 그러나 평안도 출신들은 차별 때문에 과거에 합격해도 요직에 나갈 수 없었고, 서울의 사대부들은 평안도 사람과 혼인하기를 꺼렸다. 계속되는 차별에 더해 세도정치의 등장과 함께 나날이 심해지는 경제적 수탈. 마침내 홍경래가 일어섰다. 순식간에 평안도 여덟 고을을 점령한 봉기군. 조선에 저항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목차

서문 ‘역사를 바꾼 그날’로 들어가 보는 즐거움

1 반란의 칼끝에 탕평으로 맞서다
영조를 위협한 괘서 사건 | 반란의 원인은 무엇인가? | 무신란의 계획과 준비 과정 | 백성들은 반란에 왜 참여했나? | 예언서 『정감록』,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다 | 영조가 둔 신의 한 수, 정미환국 | 반란은 마침내 일어나고 | 소론에 반란 진압을 맡기다 | 무신란의 스타, 오명항 | 영조, 사태를 현명하게 수습하다 | 영조의 아킬레스건, 정통성 | 탕탕평평, 영조의 탕평책 | 시대의 요리사 영조

2 백성들의 슈퍼 히어로, 어사 박문수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 | 마패, 암행어사의 상징? | 암행어사의 필수품, 유척 | 박문수는 암행어사가 아니었다? | 박문수, 출세 가도를 달리다 | 백성들의 영웅 | 소금 장수 박문수 |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 군역, 백성들을 괴롭히다 | 군역의 의무를 회피하는 양반들 | 반값 군포를 실현하다 |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 박문수와 영조 | 백성을 사랑한 박문수와 영조 | 임금과 신하의 콤비 플레이

3 아바마마, 소자의 죽을죄가 무엇이옵니까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 | 영특했던 사도세자의 유년기 |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 어긋나는 아들 | 사도세자, 무예서를 편찬하다 | 멀어져만 가는 사도세자와 영조 | 갈등의 원인은 무엇인가? | 사도세자, 영조의 시험대에 오르다 | 죽음을 부른 사도세자의 광증 | 금주령을 어긴 사도세자 | 사도세자, 궁 밖으로 나가다 | 나경언 고변 사건 | 내 아들을 죽여 주오 | 사도세자, 죽을 수밖에 없었나?

4 죄인의 아들 정조, 왕이 되다
고독했던 죄인의 아들 | 삼대의 엇갈린 운명 | 너무나 건강했던 영조 | 빅 데이터를 통해 분석해 본 정조 | 정조의 실제 모습은? | 만약에 정조가 없었더라면 | 연이은 암살 시도에 맞서다 | 정조의 선택, 복수냐 탕평이냐 | 개혁가 정조, 수원 화성을 건설하다 | 정조와 문체반정 | 용서와 화합을 선택하다

5 정조, 소상인의 눈물을 닦아 주다
시전과 난전, 그리고 금난전권 | 18세기 조선의 시장을 가다 | 육의전이란 무엇인가? | 소상인 울리는 금난전권 | 시전에 집중된 특권, 그 이유는? | 내 억울함을 들어주오 | 상언과 격쟁, 비효율적이고 위험하지는 않았을까? | 덩치 커진 시전, 그 배후는? | 채제공, 개혁 정책의 선봉에 서다 | 경제개혁의 포문을 열다 | 온 백성을 비추는 달이 되고자 한 군주

6 정조 최후의 날,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정조는 정말로 독살당했을까? | 죽음의 원인은 연훈방인가? | 정조의 처방전 | 힐링이 필요한 왕 정조 | 정조와 정순왕후 | 조선 시대 당파의 계보 | 심환지, 범인으로 지목당하다 | 정조와 심환지, 비밀 편지를 주고받다 | 대탕평을 향한 치밀한 국정 운영 | 정조의 개혁 성과와 한계 | 우리에게 정조는 어떤 의미로 남았나? | 영원한 개혁 군주로 남다

7 순조,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던 날
세도정치란 무엇인가? | 세 명의 왕비를 배출하다 | 정조는 김조순의 딸을 왜 선택했나? | 정조의 모순 | 김조순, 위기를 맞다 | 처세의 천재 김조순 | 발 뒤의 정치, 수렴청정 | 김조순, 권력의 중심에 서다 |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본격화하다 | 부패한 세도정치가 불러온 매관매직 | 과거제도의 권위가 무너지다 | 혼인으로 이은 권력 | 거꾸로 돌린 역사의 수레바퀴

8 홍경래의 난, 저항의 시대를 열다
저항의 시작, 홍경래 일어나다 | 방랑 시인 김삿갓을 낳다 | 홍경래, 그는 누구인가? | 홍경래와 함께한 사람들 | 평안도는 왜 차별받았나? | 매향의 부정부패 | 세도정치를 규탄하다 | 봉기군, 송림 평야에서 무너지다 | 관군, 초토전술을 펴다 | 항쟁의 주역이 된 농민들 | 정주성 전투, 공성과 수성 | 홍경래의 난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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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우리에게는 수많은 기록과 기억이 있다. 그것들을 꿰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나와 너, 우리가 탄생한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한 사실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며, 때로 무기가 되고 거울이 된다. 역사의 무궁한 힘을 믿기에 그것을 세상과 나누기 위해 읽고 쓰고 뛴다.

수십 명의 PD와 작가, 스태프와 패널들이 모여 2013년 가을 첫 방송을 시작한 「역사저널 그날」은 토크쇼 형식을 빌려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는 신선한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딱딱하고 일방적인 지식 역사가 아니라, 웃고 떠들고 눈물짓는 이야기 역사, 사람의 살 냄새 짙은 사랑방 한담 같은 맛으로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갈채를 받고 있다.

역사(History)란 무엇보다 이야기(Story)임을 보여 주고자, 끊임없이 만나고 엮고 실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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