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혜진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6년 8월 19일
ISBN: 978-89-374-3328-3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5x205 · 256쪽
가격: 12,000원
분야 한국 문학
“이런 일은 돈이 없어서 하는 거고.어디까지나 잠시만 하는 거고.
이런 건 내가 진짜 하려는 일이 아니고.나는 취업 준비를 하는 중이고…
어쨌든 더 나은 일을 구해야 했다.”
인터넷 방송 진행자(BJ), 일용직 근로자, 해고 노동자, 편의점 알바생, 치킨 배달원……
‘직선 문장’들로 평평하고 담담하게 그려 낸 자리 없는 청춘들의 미니멀 라이프
『어비』에 실린 소설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초상을 보여 준다. 길거리 어디서나 스쳐 지나기 쉬운 인물들의 조용한, 그러나 혼신을 다한 꿈틀거림. 얼핏 생의 언저리를 떠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자리한 변방이 실상 이 소설집의 인물들에게는 치열한 중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생의 가차 없음을 그려 내는 냉정한 시선, 그 바닥에 깔린 해학은 첫 작품 「치킨 런」에서부터 드러난다. 죽음밖에 길이 없는 사내와 살기 위해 그 죽음에 가담한 배달원. 그 처절한 현실에 몸담고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거리 두기를 유지함으로써, 김혜진은 사소한 듯 치명적인 ‘관계’의 여러 양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 준다. -이혜경(소설가)
어비
아웃포커스
한밤의 산행
치킨 런
쿵푸하는 자세
광장 근처
줄넘기
와와의 문
비눗방울맨
작품 해설_단호한 표정의 정직한 소설/ 노태훈(문학평론가)
“상황은 암울하고 비극적인데 세부는 웃음을 짓게 만드는 희극” “현재적이고 현세적인 동시에 파격적” 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작가 김혜진의 첫 소설집 『어비』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김혜진 작가는 2013년, 거리에서 노숙하는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중앙역』으로 상금 1억 원의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희망은커녕 절망조차 불가능한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 더러움 안에 빛나는 인간을 부여잡는다” “현재형의 직선 문장들이 벼랑이 되었다가 평지가 되는 문체의 힘은 오랫동안 우리 문학의 자산이 될 것이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다시 한번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꾸준히 선보인 단편소설들은 독자들에게 공명하는 동시대적 소재와 건조하고 미니멀한 표현이 절묘한 균형감을 이루며 고유한 색깔을 형성해 가고 있다.
작가가 4년 동안 발표한 단편소설 9편으로 구성된 소설집 『어비』는 20~30대 청춘들의 불안정하고 임시적인 삶의 절망적 현실을 해학적 상황과 수식을 배제한 직선적 문장으로 표현한 독특한 매력을 선보인다. 표제작 「어비」는 1년 동안 발표되는 중단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을 선정하는 『2016년 올해의 문제소설』에 실려 청춘의 새로운 모습을 핍진하게 포착한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한밤의 산행」 역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이라는 소재로 한겨레출판 문학웹진 《한판》에 연재됐던 13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테마 소설집 『한밤의 산행』의 표제작으로 수록되어 독자들에게 선보인 적 있다. 김혜진 단편소설에 나타나는 핍진한 현실과 그 속에 담긴 해학과 유머는 독자들로 하여금 사회를 바라보는 청춘의 시선과 청춘을 자극하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 하드보일드적 문장으로 도달한 ‘최소한의 세계’
수식할 여유조차 없다는 듯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는 김혜진 소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미학이다. 독자들은 책 어디를 펴도 최소한의 문장으로 최소한의 내용만 전달하는 미니멀리즘을 만날 수 있다. 이는 단기로 일하고 임시적으로 일하는 청년들의 현실과 그들이 추구하는 소박하고 간소한 인생을 더 가까이 느끼게 만든다. 작중 인물 중 표제작 「어비」에 등장하는 ‘어비’ 역시 최소한의 삶을 산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나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불필요한 것들’은 배제하고 자신의 현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로만 세계를 구성한다. 이는 많은 것을 꿈꿀 수 없는 세대들의 역설적 노력을 암시한다.
할 말이 없어요.
한참 만에 어비가 중얼거렸다.
말할 게 없다고요.
그러면서 어비는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그 순간엔 정말이지 멀쩡한 사람 같았다. 말 못할 가연을 가졌거나 심각한 상처를 입었거나. 무료할 때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그런 추측과 억측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별로 말할 게 없어요. 진짜요.
그리고 어비는 정말 아무 말 없이 일을 그만둬 버렸다.
-「어비」에서
■제대로 된 일에 대한 젊은 세대의 고민
하지만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제대로 된 일’을 해야 한다는 불안감은 소설 속 인물들의 공통된 심리 상태다. “어쨌든 더 나은 일을 구해야 했다. 저도 이제 좀 제대로 취업을 해야죠.” “이렇게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가까워질 테고 그러면 제대로 된 업무를 할 수 있겠지. 일다운 일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식의 언급은 「어비」에서뿐만 아니라 매 작품마다 한두 구절씩 찾아낼 수 있다. 지정된 일터, 근무 시간, 보장된 정년, 안정된 임금, 사회로부터의 인정, 개인적 성취감… 무엇보다 그 일이 지금보다 나아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끊임없이 좀 더 나은 곳을 찾아야 하는, 하지만 그다지 나아지지도 않는 젊은 세대의 고민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표출된다.
■서민들의 일상적 공간으로서의 광장, 김혜진 소설의 본토
과거 문학에서 ‘광장’이 정치적 공간이었다면 김혜진 소설에서 광장은 누군가가 생활하는 일상의 공간이다. 작품 해설을 쓴 노태훈 평론가는 ‘광장’을 김혜진 소설의 본토라고 설명한다. “모든 것이 모여 혼잡하게 뒤섞여 있는, 이 세계의 축소판 같은 곳. 투쟁과 저항, 폭력과 억압, 열정과 욕망, 무기력과 절망, 일상과 비일상이 두서없이 출몰하는 그곳에서 김혜진 작가가 보는 곳은 뒤편이거나 구석이다. 광장에서 DVD를 판매하는 사람, 비눗방울을 부는 사람들이야말로 김혜진의 시선에 포착된 광장의 풍경이다.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것이 그곳에 늘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임을 강조한다.” 김혜진 소설에서 광장은 일상이 계속되는 터전이다. 정치적 수평이 실현되는 공간으로 상징되던 광장에서 중심과 멀어진 채 주변화된 서민들의 계층화된 일상이 벌어지는 광장의 모습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광장의 모습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청년 세대의 풍경을 근거리에서 관찰하기 좋아하는 김혜진 소설이 세대를 넘어 사회와 공명하는 이유다.
■ 수록 작품 소개
어비
일용직을 전전하던 화자가 한때 두 곳의 회사에서 만났던 어비. 말도 없고 사람들과 관계도 맺지 않던 어비를 다시 만난 곳은 인터넷 개인방송이다. 방송을 진행하는 어비는 미련해 보이는 ‘먹방’을 진행하는가 하면 뜬금없는 곳에 찾아가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자신의 모습을 중계하기도 한다. 시청자들에게 별풍선을 받아 내는 데 열심인 어비의 모습은 현실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풍경이다. ‘나’는 별풍선을 받아 돈을 버는 어비와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일용직 근로자 어비를 일치시키지 못한 채 그의 불분명한 실체 앞에서 아연해진다.
아웃포커스
20여 년을 상담원으로 근무한 회사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한 ‘엄마’는 손수 만든 휴대폰 모형 안에 들어가 1인 시위를 벌인다. 엄마의 시위를 돕기 위해 자리를 비운 ‘나’도 편의점에서 해고당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속도로를 내기 위해 할머니의 산소를 옮기라는 연락을 받은 식구들은 보상금을 받기 위해 묘소를 옮겨야 되는 상황에 놓인다. ‘자리’ 때문에 벌어지는 3대의 상황이 기묘하게 닮은꼴이다.
한밤의 산행
한밤중 재개발 지역 철거 용역 두 사람이 취업을 위해 아르바이트하는 시민운동가 학생을 ‘처리’하는 상황이 대화 중심으로 묘사된다. 폭력적 상황이 주는 위협적 긴장감이 ‘근로자’와 ‘취업 준비생’이라는 생활인의 정체성으로 인해 아이러니하게 해소된다.
치킨 런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하는 남자와 실수로 그 남자의 집에 들른 치킨 배달원이 서로의 목적을 위해 자살에 담합하는 이야기. 남자의 자살이 한 번에 ‘성공’하면 그의 전재산 50만 원을 모두 가질 수 있다는 제안에 공조를 허락했지만 일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돈의 액수도 줄어든다. 극단적 방법으로 절망을 해결하려는 주인공들의 선택과 희극적이며 필사적인 상황이 현실의 비극을 대조적으로 보여 준다.
쿵후하는 자세
직업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자전거 타고 광장 일대를 배회하며 풍경을 관찰하는 ‘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의 정체를 요구하고, 그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뿐인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설명하며 점점 더 곤란한 상황으로 빠져드는데…
광장 근처
모두가 존경하는 그분이 광장에 나타났다. 멀리서 보이는 광장은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한 평등과 개방의 장소다. 한편 안에서 그려지는 광장은 이기심과 무시가 횡행하는, 중심과 주변, 위와 아래가 무한히 구분된 차별과 위계의 장소에 다름 아니다. 프란체스코 교황 방한의 날 광장에서 벌어지는 천태만상을 통해 광장의 본질을 묻는다.
줄넘기
연인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받고 방황하던 ‘나’는 공원에서 매일 줄넘기하는 노인을 만난다.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수백 번씩 줄넘기를 하고 있다는 노인이 들려주는 방법은 ‘나‘ 또한 줄넘기의 세계에 도전해 보게 만든다. 밑져야 본전! ’나‘는 ’반복의 세계‘를 한번 믿어 보는데…
와와의 문
서로 다른 나라 출신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와와’와 ‘나’는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등록한 학원에서 대화를 시작한다. 누구나 관심 가질 만한 거대한 이야기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빗겨나가 하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반면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소소하고 작은 생활 속 이야기들은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이해에 도달한다. 소통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소설.
비눗방울맨
‘나’는 ‘너’의 고양이를 3개월 동안 맡아 키우고 있다. 돌려주려는 계획이 틀어지고 다시 철수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나’는 지나가던 광장에서 벌어진 시위대의 격렬하고 팽팽한 대립 때문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그때 ‘나’의 시선에 우스꽝스러운 화장을 하고 사람들의 갈등에는 상관없다는 듯 한가롭게 비눗방울을 날리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본문에서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마우스를 움직이고 차례로 열리는 인터넷 창을 따라 아주 멀리까지 갔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정말 엉뚱한 곳에 멍청히 서 있는 꼴이었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어비가 있는 곳까지 가게 될 거라고 예상한 적은 없었다. 거기.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 방송을 하는 사이트였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방송을 하고 누구나 시청할 수 있는 곳이었다. -23쪽신기했고 재미있었는데 뭐랄까, 불쾌해졌다. 별풍선 하나는 100원. 열 개는 1000원. 열 명이 열 개씩이면 만 원. 100명이 100개씩이면 100만 원이 되는 거였다. 그걸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가게도 내고 사업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러려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 말이나 하게 됐다. 아무 방송에나 들어가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쫓겨나고 또 쫓겨나고 계속 쫓겨나는 게 그즈음 내가 밤마다 하는 일이었다. -24쪽
그래도 출근은 할 거야. 그리고 엄마는 한참 만에 또박또박 다짐했다. 그런 다음 정말이지 계속 회사에 나갔다. 지각이나 결근 한 번 없었던 지난 20년처럼. 8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일을 반복했다. 다녀올게, 하며 나갔다가 다녀왔어, 하며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엄마의 자라, 단 하나였다. 회사 안에 있던 엄마의 자리가 바깥으로 옮겨진 거였다. -47쪽
아니, 글쎄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아무도 모르면 어떡합니까? 우리가 일을 안 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요? 돈을 안 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74쪽
학생 아닌가? 감독관이 묻는다. 졸업했어요. 그가 답한다. 그럼 일을 해야지. 감독관이 꾸짖는다. 일하는데요. 그가 항변한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 일을 해야지. 감독관이 그의 물건들을 상자에 쓸어 담는다. 이것도 진짜 일인데요. 그가 상자를 잡고 버틴다. 이런 게 일이지. 내가 하는 거 말이야. 진짜 일은 이런 거야. 감독관이 강제로 물건을 압수한 뒤 떠난다. -1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