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을 향한 무차별 헐뜯기
혹은 꼰대 되기 싫은 어른의 참신한 자기반성
“이 책은 이웃의 부조리와 사치를 비꼬면서, 이에 동참하는 소시민적 자신
또한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는 재치를 보여 준다.” -만화가 이자혜(웹툰 「미지의 세계」의 작가)
뉴타운 월세 아파트 주민이자 두 아이의 아빠이며 (개저씨가 되기 싫은) 아저씨 입문자 이지원의 산문집.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 몇 권의 번역서와 저서를 내놓으며 차근차근 애독자를 확보해 가는 디자이너 이지원의 본격적인 에세이스트 기질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최신 기기를 사들이기 빠듯하지만 논어답터로 살 자신은 없어 레이트어답터에 만족하고, 자작나무 오솔길을 걸을 여유는 진작에 포기하는 대신 재정비 촉진 지구를 걸으며 경전철 공사 현장을 유유히 둘러보기 즐기는 저자는 마치 한때는 타고난 턱과 송곳니를 자랑하던 육식 야생동물이었으나 이제는 삭막한 도시 환경에 완벽 적응한 우리의 이웃 생물 ‘길냥이’를 상기시킨다.(유연하고 시큰둥하며 느긋한 데다 알고 보면 속 깊다.)
나이 마흔에 접어든 젊은 중년 이지원은 하루에도 열댓 번씩 솟구치는 분노를 경험한다.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 제 용건만 묻고 사람을 놀래고 가는 아줌마나 마트 카트에 아들내미를 태우고 황홀한 드리프트를 구사하는 아저씨, 대형 마트에서 파는 물이 빠지지 않는 플라스틱 비누각과 24시간 편의점에서 구입했으나 원하는 대로 뜯어지지 않는 과자 봉지 등에 시달린다. 이웃의 배려나 제작자의 양심, 자족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선뜻 추천하기 힘든 책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전혀 힐링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익히 들어 온 허망한 허공 비난 대신 제 살 깎아먹기를 통한 자기반성(인분 교수를 들어 교수의 ‘철밥통 근성’을 욕하는 저자 역시 현재 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 충고이기는 하나 배꼽 빠지게 웃긴 볼멘소리 등에서 꽤 신선한 감정 순화를 체험하게 된다. 한편 본문 꼭지마다 수록된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최진영의 삽화는 뛰어난 독해력과 참신한 표현력으로 책의 매력을 한층 부각한다.
행복은 훌륭한 선생이다
제작자의 양심,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 귀해진 세상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만든 사람의 애착이 담긴 상품”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저자 역시 이러한 드문 행복을 선사한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경례하며 그들의 장인정신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한다.
요즘엔 실용성을 이유로 펜글씨를 거의 쓰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폼 잡고 쓸라 치면 묵직한 파버카스텔을 손에 쥐고 휘두른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기분이 좋아진다. 3만 원에 구입할 수 있는 저가 보급형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품질이 뛰어나다. 새삼스러운 묵직함, 차가운 금속 질감, 여기에 더해 켄트지 같은 거친 종이가 받쳐 준다면 글씨를 쓰는 절묘한 감촉과 잉크의 번짐이 선사하는 맛은 가히 W호텔의 초콜릿 푸딩보다 매혹적이다. ……파버카스텔 사를 창업하신 독일인 카스파르 파버 씨를 비롯해 지금껏 이 회사에서 많은 제품을 설계한 만년필 오덕들, 부품을 만든 하청 업체 직원들, 중국 공장에서 제품을 조립한 직원들이 나를 보며 만족하는 표정과 그들을 향해 존경의 묵례를 하는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 본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아 성찰이나 사색의 여유를 거창하게 생각하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훗날로 미뤄 두는 라이프스타일을 고수할 때 저자는 그저 조금 소박해졌다. 아침 두 시간을 집중이 필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각별히 떼어 놓고, 그중 첫 20분은 커피 내리기에 투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맑은 물을 옆에 놓고 커피콩을 간다. 커피콩은 생각보다 단단하다. 그라인더로 와그작와그작 미친 듯이 갈면 손목이 꺾일 듯이 아프다. 고소하면서 신 내 나는 커피가루는 주변에 은밀한 분위기를 부여한다. 세상 모든 고뇌를 다 짊어진 남자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마치 뒷골목에서 마약을 제조하는(하지만 원빈처럼 잘생긴) 범죄자 느낌으로 무심하지만 섬세하게 커피가루를 사락사락 옮겨 담는다. 방금 전까지 똥줄 빠지게 그라인더를 돌려 대며 실추한 멋스러움을 극적으로 만회한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거만하게 잔을 내려다보며 뜨거운 물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공급한다. 이때는 목마른 죄수를 약올리는 간수가 된 기분이다. 얄궂게 두세 방울씩 떨어뜨리는 물방울을 커피가루가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 이때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 더 멋지다. 한때 커피 메이커가 해 주던 일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아침마다 커피 내리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그 대가로 한층 멋있어졌다. — 본문에서
자작나무 오솔길을 바라지도 않는다. 산책할 수만 있다면 재개발 촉진 기구조차도 훌륭한 지면을 제공해 주지 않는가.
역사상 수많은 위대한 사상이 이 간단한 걷기 활동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라. ……도시인의 영광과 좌절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무대인 이곳, 아파트와 원룸 주택이 빽빽한 이 재개발 촉진 지구 골짜기가 나의 생각을 펼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도시인의 사색은 쓸쓸하기보단 치열하고, 평화롭기보단 전투적이다. ……이 길을 따라 거대 아파트 무리가 협곡을 이루고, 경전철 공사 중장비가 굉음을 내며 땅을 두드린다. — 본문에서
불행은 그보다 더 훌륭한 선생이다
아저씨의 악명은 아줌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심지어 개저씨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요즘 SNS에서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이라든지, 「회식자리에서 진상인 상사」, 「40대에 하지 말아야 할 말들」과 같은 글이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면, 아저씨 집단이 받는 미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아저씨가 진상인 이유는 아줌마보다 악질적이다. 아저씨에게는 타인을 얕잡아보고 굴복시키려는 악랄한 권력욕이 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 싶으면 어떻게든 뜯어고치려고 안달이다. 하지만 강한 상대 앞에서는 표정을 싹 바꾸고 비굴한 아첨에 돌입한다. 이보다 더한 꼴불견이 어딨겠는가. — 본문에서
일상에서 싹트는 불쾌감, 즉 불행의 요인은 도처에 깔려 있다! 그러나 버럭 화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는 대신 저자는 마트에서 소란스레 카트를 몰고 가는 이들을 상대로 ‘카트 예절’을 성문화 및 선포하고, 뉴타운 테니스 클럽의 텃세를 극복하기 위해 추운 계절의 새벽 기상과 모진 훈련을 마다 않는다. 그리고 쓸모를 다하지 못하고 일찍 버려진 ‘머스트 해브 아이템’들을 둘러보며, 오늘도 묵묵히 산책한다.
뉴타운 주민은 오늘도 크고 작은 희망을 걸고 물건을 사 모은다. 버려진 소파, 장롱, 탁자를 볼 때마다 홀로 쓸쓸하다. 20평형 월셋집에 천연 면피 북유럽 가죽 소파 풀 세트를 들여놓고, 그 위에 드러누워 치킨을 먹으면서 주말 예능 프로그램을 보겠다는 어느 뉴타운 주민의 가열한 야망이 곰팡내 나는 스폰지와 함께 차갑게 식어 버렸음이 애석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는 저 물체에 몸을 기대고 위로를 구하지 않았던가. — 본문에서
그리고 저자는 잘못된 인간에게 아첨하느라 소모하는 노력을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정당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 쏟는 편을 선택했다.
교육 철학이나 비전에 대해서는 일말의 언급도 없다. 현재 대학생들이 감내하는 온갖 어려움과 무관하게 이 광고는, 이 글자꼴은 현기증 나게 낙관적이다. 그렇다. 대학교는 꿈을 만나는 곳이니까, 대학생은 망설이지 않는 청춘이니까 저런 가증스러운 글자꼴이 어울리겠지. ……(나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세상 한구석에서 사락사락 글자꼴을 자아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책에, 광고에, 스마트폰에, 도로 표지판에 뿌려진 그것을 눈으로 흡수한다. 훈훈한 얘기다. 마치 구둣방 할아버지와 난쟁이 요정같이. —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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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과 잔디
미국인과 잔디2
부주의한 까마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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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가서 다시 연락할게
왜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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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대전 엑스포
독자 평점
3.5
북클럽회원 2명의 평가
한줄평
도서 | 제목 | 댓글 | 작성자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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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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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좋아요 | 2021.7.5 | |||
헬조선을 향한 무차별 헐뜯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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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앍 | 2018.11.16 | |||
점심시간의 디자이너들여, 이 책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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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 2018.5.21 | |||
명존쎄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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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뭉 | 2016.8.25 |
읽다보면 피식피식 웃음이 지나간다.
작고 사소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지만 읽다보면 공감도 많이 되고 피식피식 웃음이 많이 났던 책이다. 대한민국 사회 속에서 당연시되고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관습 및 문화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