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청년 이한열
그의 운동화가 김숨의 문장으로 되살아난다
“L의 운동화는 싸우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 하는 ‘의지’가 L의 운동화에 발생한 것이다.”
● 개인의 물건이 시대의 유물로, ‘그날’의 운동화가 되살아난다
김숨 작가의 여덟 번째 장편소설 『L의 운동화』가 출간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청년 이한열의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김숨은 최근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연달아 수상하며 독자와 평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2005년 첫 소설집 『투견』을 시작으로 10여 년 동안 김숨은 매해 쉼 없이 소설집 4권, 장편소설 7권을 펴냈다.
전작 『바느질하는 여자』가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써 내려간 소설이라면, 『L의 운동화』는 산산이 부서져 내린 운동화를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 나가며 복원해 내는 작품이다.
이한열은 19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22살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희생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150만 추모 인파가 모여들었다.
피격 당시 이한열이 신었던 270㎜ 흰색 ‘타이거’ 운동화는 현재 오른쪽 한 짝만 남아 있는 상태다. 시간이 흐르면서 밑창이 100여 조각으로 부서질 만큼 크게 손상되었지만, 2015년 그의 28주기를 맞아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김겸 박사가 3개월 동안 복원하여 현재 이한열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김숨 작가는 김겸 박사의 미술품 복원에 관한 강의를 듣고, 과천에 있는 김 박사의 연구소를 방문해 복원 작업을 지켜본 후, 운동화가 복원되는 과정을 소설로 재탄생시켰다. 『L의 운동화』는 한 개인의 사적인 물건이 시대적, 역사적 유물로 의미를 부여받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미술품 복원 전반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이한열의 생존 당시 이야기와 그의 친구들 및 유가족들의 뒷이야기도 그려졌다.
이 소설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통해 한 시대의 슬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는 운동화 한 짝이 ‘사적인 물건’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시대를 대변하는 물건’으로 역사적인 상징이 되는 과정을 김숨 작가 특유의 집요하고 치밀한 묘사력으로 세세히 그려내며, 삶과 죽음, 기록과 기억, 훼손과 복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짓밟히고 부서지고 사라진 것들을 되살리고 기억하려는 마음
소설은 마크 퀸의 자화상 「셀프」로 문을 연다. 자기 두상을 모형으로 한 석고 거푸집에 자신의 피를 부어 응고시킨 작품이다. 청소부가 실수로 작품을 보관한 냉동고의 전원 코드를 뽑는 바람에 피가 녹아내려 훼손되었다.
마크 퀸이 죽은 뒤 저 작품이 망실(亡失)될 경우, 저것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피는 살아 있는 몸속에서 생성되고 순환하는 오묘한 재료였다. 온도에 따라 변질, 소실되기 쉬운 피를 다급히 수혈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 ‘피’라는 물질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냥 피가 아니라, 마크 퀸의 피를. 만약 30대 초반에 모은 피로 제작한 「셀프」일 경우 그 당시의 피를 대체할 물질을. 다른 사람의 피가 섞여도 그것을 여전히 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밖에도 마르셀 뒤샹의 「제발 만지시오」,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 요셉 보이스의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법」, 렘브란트의 「야경」과 「자화상」,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잠이 든 뮤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로댕의 「입맞춤」, 토레스의 「무제-완벽한 여인들」, 다니엘 스포에리의 「덫에 걸린 그림들」까지, 많은 예술 작품들이 언급되며, 실제 미술품 복원 사례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복원’이란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다.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은 ‘L의 운동화’의 본디 모습 그대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L의 운동화’의 ‘본디 모습’은 무엇일까. 공장에서 이제 막 생산되어 나온 직후? L이 운동화를 사서 처음 신은 때? 최루탄을 맞을 당시? 작품 속 화자인 복원가는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동안 끊임없이 고민한다. L의 운동화를 최대한 복원할 것인가? 최소한의 보존 처리만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것인가? 레플리카를 만들 것인가?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28년 전 L의 발에 신겨 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복원’과 ‘훼손’은 종이 한 장 차이이며, “원작의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 ‘적정한 선’에서 작업을 멈추는 것은 복원가의 역량이자 덕목”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과 테세우스, 동화 속 「신데렐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 고대 신화부터 최근 문학 작품에 이르기까지 ‘신발’은 주요한 오브제로 쓰여 왔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도 죽은 아들의 낡은 신발을 발견한 아버지는 신발에 입을 맞추며 울부짖는다. “아가야, 일류셰치카, 귀여운 우리 아가, 네 발은 어디 갔니?”
‘신발을 신고 걸어온 역사’라는 의미의 ‘이력(履歷)’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신발은 그 사람의 역사, 바로 그 사람 자신을 상징한다. 작품 속 ‘L의 운동화’는 “살과 피와 뼈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생명체, 영혼이 깃들어 있는” 물건으로 그려진다.
어릴 때 어머니는 연년생인 형과 내게 유니폼처럼 똑같은 옷을 사 주고는 했다. 한날한시에 똑같은 옷을 사 주는데도 형의 옷이 번번이 먼저 해지는 것을 나는 의아해했고, 습관뿐 아니라 성격과 기질이 그 사람의 옷과 신발과 가방 같은 물건에 고스란히 기록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은 그 개인의 기록물이기도 하다는 걸.
“물건들은 단순히 물건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의 흔적을 간직하며, 우리를 연장시켜 준다.” 작품 속 복원가를 찾아오는 의뢰인들에게 복원이란, 그 물건의 소유자를 되살리는 일이자 애도하는 행위이다.
“똑같은 상표의 운동화여도, 옆집 아이의 운동화와 내 아들의 운동화는 다르겠지요. 어떤 여자가 아들의 운동화를 복원해 달라고 복원가를 찾아온다면, 그 운동화가 그 여자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운동화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운동화가 귀한 물건도 아니고, 새 운동화를 얼마든지 사 신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차마 버리지 못하고, 심지어 운동화 값보다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어떻게든 복원해 간직하고 싶어 하는 데는 말이지요. 지극히 사적인 의미와 가치가 저를 설득하거나 매혹할 때, 저는 복원하고 싶은 의지와 욕구를 느낍니다.”
이 작품 속에는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언급된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효순과 미선, 제주4.3사건, 일본군 위안부 사건, 홀로코스트까지. 역사 속에 억울하게 스러져 간 많은 사람들을 우리 기억 속에 되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7만 8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은 폴란드 마이다네크 수용소에 산처럼 쌓인 5만 7천 점의 피해자 신발을 언급하며 끝을 맺는다.
“원래는 똑같았을 신발들은, 더 이상 똑같은 신발이 아니었다. 그것을 신었던 사람들에 의해 전혀 다른 신발이 되어 있었다.”
김숨 작가는 이 작품을 일컬어, “‘이한열 운동화 복원’이라는 큰 흐름 속에 있는 소설”이라고 말한다. 조각조각 산산이 부서져 내린 운동화를 복원하듯, 한 조각 한 조각 김숨의 문장으로 숨을 불어넣어 부서진 운동화가 되살아나고, 희미해진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사라져 버린 ‘그’가 되살아나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삼화고무에서 나온 흰색 타이거 운동화가, 영문으로 타이거(TIGER)라고 쓴 로고가 붙어 있던 그 운동화가 실은 제게도 있었습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제 친구 M도, J도, L도, K도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L의 운동화는 저의 운동화이기도 하면서 M과 J와 L과 K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시절 L의 운동화와 똑같은 운동화가 몇 켤레나 만들어지고 팔려 나갔을까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L의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요?”
최루탄에 쓰러진 L을 부축한 마음, L을 병원 응급실로 옮긴 마음, L의 운동화를 들고 응급실 앞에서 기다린 마음, L이 툭툭 털고 일어나기를 기도한 마음, L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애도한 마음, 그를 영원히 기억하려는 마음, 그 마음들….
그 소중한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 소설을 독자들이 읽음으로써 ‘L의 운동화’의 복원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 본문에서
L의 운동화라고 했다.
채 관장은 L의 운동화를 가져오는 대신에, 그것을 찍은 사진을 가져왔다. 운동화가 손으로 집어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나는 사진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진 속 L의 운동화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L의 운동화가 질량, 밀도, 탄성 등 물리적 성격을 띤 ‘물질’이라는 것. 또 하나는 유물이든, 예술 작품이든, 유품이든 ‘그 어떤 물질’이라는 것이었다. 단일 물질이든, 여러 물질의 조합이든. —15쪽
그러고 보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 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 —33쪽
“피해자도, 증인도 없는 법정을 상상해 보았어요. 피해인석과 증인석은 비어 있고, 사건과 사건 번호와 배심원들과 재판장과 피의자만 있는 법정을요. 그럴 때 L의 운동화가 피해자이자 증인이 되어 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55쪽
1987년 6월 9일, 집회가 열리던 그곳에는 천여 명의 학생이, 따라서 이천 개의 발들이 운집해 있었다. 집회가 끝난 뒤 이천 개의 발들은 분주히 흩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L의 왼발에서 벗겨진 운동화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듯 발들 속에 집어삼켜졌을 것이다.
자신의 왼발에서 운동화가 벗겨질 때, L은 그것을 알아차렸을까. 나처럼 허물이 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벗겨진 운동화를 다시 신으려고 L은 허둥거렸을까.
단발이거나 긴 생머리이거나 어색하게 파마를 한 여학생이, L의 운동화를 주워 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날개를 다쳐 날지 못하는 새를 주워 드는 심정으로 L의 운동화를.
여학생의 손이 뻗어 와 혼비백산한 자신을 들어 올리는 순간, L의 운동화는 구원의 손길을 만난 듯 안도했으려나. —59쪽
유품이 된 운동화는 L에게 몇 번째 신발이었을까?
그 당시 L의 것과 똑같은 운동화가 몇 켤레나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팔려 나갔을까?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L의 운동화와 똑같은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
나는 애타게 L을 기다렸을 왼짝 운동화를 생각한다. 어떤 여학생이 주운 왼짝 운동화를, 주인이 끝끝내 찾아가지 않았다는, 끝끝내 찾아가지 않아서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갔을 운동화를. —82~83쪽
예술품으로 치자면, L의 운동화는 레디메이드(Ready made)다. 레디메이드는 뒤샹이 전시를 위해 ‘선택’한 기성품에 붙인 용어로, 기성품이 예술품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을 뜻한다. 뒤샹은 대량 생산된 기성품에 어떤 변형도 가하지 않고 단순히 제목을 붙이고, 사인을 넣어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럼으로써 미(美)가 창조가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L의 운동화는 대량 생산된 기성품이었지만 특별히 ‘선택’되었다. 뒤샹 같은 특정한 예술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에 의해서, ‘시민’에 의해서. —83쪽
“저 운동화가, 우리 아들이 신었던 운동화라고 하니까, 우리 아들의 운동화인가 보다 해요……. 우리 아들의 운동화인가 보다……. 나는 솔직히 저 운동화가 우리 아들이 신었던 운동화인지 잘 모르겠어요.” —124쪽
“우리 아들이 어디서 죽었을까…… 왜 죽었을까…… 도망가다 죽었을까…… 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더라도 뒤에서 하라고 했는데…… 뒤에서…… 뒤에서 하라고 했는데…… 위험하니까 하더라도 앞에서 하지 말고…… 사진을 보니까 앞에서 했더라구요…… 앞에서…….” —125~126쪽
“나는 역사를 기억의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억은 구체적인 매개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데, L의 운동화 같은 물건이 그 매개물이 아닌가 싶어요.” —135쪽
그녀가 가 버리고, L의 운동화 앞에는 또다시 나 혼자 남겨진다.
갑자기 모든 게 혼란스러워지면서 내 작업대 위 L의 운동화가 어쩌면 환(幻)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마저 든다. 만질 수도, 집어 들 수도, 신을 수도 없는 환. —203쪽
L의 운동화는 세대를 걸쳐 다시 복원될 것이다. 한 세대, 두 세대를 걸쳐서. 내가 하고 있는 복원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다. 현재 내가 L의 운동화에 진행하고 있는 복원 방법은 100년, 혹은 200년 뒤에 있을 복원 작업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224쪽
1부 9
2부 137
감사의 말 275
참고와 인용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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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 같은 , 운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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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강이 숨트는 새벽 | 2017.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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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폴라리스 | 2017.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