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 100년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에 쫓기는 우리들을 위해
“지치면 안 돼.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데미안”으로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초기작품인 “수레바퀴 아래서”는 개인적으로 “데미안”보다 더 큰 위로와 울림을 주었다.
1906년 헤르만 헤세가 이 책을 출시해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오늘날 이 책을 보며 조금도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 없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는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의 치열한 삶에 지친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며 우리만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미약한 위로를 건넨다.
“너만 그런게 그런게 아니라고. 100년 전 나도 힘들었다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달라지지 않는 삶에 좌절하면서도 그 고통이 나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적어도 고독에서는 벗어나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이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것이었을까?
지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수레바퀴의 굴레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무엇에 그토록 지치는가’이다.
소설 속 한스는 영특한 아이로 온 마을의 기대주로 성장하게 된다. 어머니 없이 홀로 키우는 아버지의 자랑으로 마을을 대표해 출세가 보장된 신학교에 합격한다. 친구도 하나 사귈 틈 없이 공부에만 매진했고 유일한 낙은 쉴 때 하는 낚시가 전부였다. 그렇게 고생한 결과, 그는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며 장학금을 받고 신학교에 갔다. 여기에서 출세가 보장된 곳이 “신학교”라는 것이 상당히 흥미롭다. 독일의 기독교적 문화 배경을 차치하고서도, 신학교가 신의 부름을 받고 가는 곳이 아닌 “출세가 보장된 곳”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신의 적성을 생각하지 않고, 일의 가치와 본질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인기가 많고 대우가 좋은 것만 생각하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맞춰 우르르 몰려가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기에, 어쩌면 지금보다 기회가 더 적었던 과거에는 이 같은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직업적 헌신보다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직업을 통해 누릴 수 있는 혜택에만 몰두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 채 달려간 곳에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달콤함만을 추구하며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더 높은 목표가 생긴 한스는 또다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그저 주변에서 원하는 대로 신학교에 가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 하며 내달린다. 방학이라고 제대로 쉬어 본 적도 없었고 좋아하는 낚시를 할 여유조차 없었고 신학교 밖에서는 조금도 쓸모가 없는 히브리어, 헬라어를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애쓰고 힘써 들어간 신학교에서도 한스를 쫓는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 다들 한스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던 학생들 속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이전보다 더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스스로를 끝도 없이 채찍질 하는 한스를 걱정해서 교장 선생님이 불러 그에게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지치면 안 돼. 그러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될 지도 몰라.”
왜 하는지도 모르는 힘겨운 싸움에 지치는 순간, 그를 기다리는 것은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 깔려 뭉개지는 초라해진 자신이었다. 한스를 생각해서 해주는 그 위로와 격려의 말이 씁쓸한 것은 그 같은 치열한 수레바퀴에 쫓기는 우리를 구원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결국 지치지 않고 최대한 수레바퀴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것 밖에 없었다.
지치지 않도록 페이스를 조절해야 한다는 위로의 말이 세상을 좀 더 살아본 선배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삶의 지혜이지만, 그 지혜조차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쫓기며 극한의 힘을 내도록 종용 받고 있다.
그리고 필자 또한 그런 조언을 후배에게 건넸었다. 대학을 다니며 수도 없는 과제와 시험, 입사 준비에 지치는 현재의 대학생 후배는 결국 지쳐 너무 힘들다며 울음이 섞인 절규를 늘어놓았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내게 마땅히 없었다. 그 지친 마음을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것 밖에는. 조금 기운을 차린 후배에게 해준 말은 이것이었다.
“힘내.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거야. 벌써 지치면 안 돼.”
한스에게 지치지 말라던 교장 선생님처럼 나 또한 더 힘들어질 앞날을 미리 경고하며 지치지 말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최선의 조언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를 뒤쫓는 수레바퀴는 무엇인가?
각 지방에서 최고 학생들만이 뽑혀 들어온 학교에서 한스는 그 안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이전보다도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 밖에 없었다. 작은 공동체 내에서 작은 바퀴에 쫓기며 수월하게 그 앞을 달려갈 수 있었던 한스는 더 크고 빠른 속도를 내는 새로운 바퀴 앞으로 오게 되었고, 더 빠른 속도로 필사적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필자가 외고에 들어가며 겪게 된 상황과 똑같았다. 중학교에서 날고 긴다는 학생들만 모여있는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서로가 우위를 가려야 하는 상황은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다. 그리고 과외를 하며 만난 나보다 어린 아이들은 나와 비슷한 압박을 더 어린 나이부터 겪고 있었다.
아이들은 잘 모르는 문제를 만나면 선뜻 풀지 못하고 계속 쳐다보고만 있었다. 내가 마치 가르쳐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가르쳐 주지 않고 어떻게든 아는 방법을 다 동원해 풀어보라고 했다.
그러면 한 두 명도 아닌 많은 아이들은 하나 같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틀리면 어떡해요?”
틀리면 어떻게 하냐니? 시험 문제도 아니고 선생님이 옆에서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문제 푸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틀리면 큰일 난다, 틀리면 안 된다, 틀리느니 차라리 안 풀고 기다리다 답을 가르쳐주는 것을 듣고 풀겠다 이런 태도였다.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화가 나 한 마디 했었다.
“다시 풀면 되잖아!”
다시 풀 수 있는 기회조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이들은 수레바퀴에 뒤쫓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번 깔리면 끝이 나버리는 수레바퀴에 시달린 우리들에게는 지칠 여유 조차 없었고, 그렇게 지친 마음을 달래줄 사람 하나 없었다.
하나 같이 지치면 안 된다며, 지친 것 조차도 네가 페이스 조절을 제대로 못한 탓이라고 비난하고 있었다.
소설 속 한스는 숨을 옥죄며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시달리며 그 수레바퀴와 상관없이 궤도를 이탈한 헤르만 하일너을 만난다. 그리고 그와 같이 수레바퀴를 벗어난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는 그 수레바퀴를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레바퀴를 벗어난 한스를 기다린 것은 패배자의 비참한 삶이었다. 고향에 돌아와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는 한스는 그일 또한 자신에게 잘 맞지 않아 고민한다. 방황하는 한스가 사과가게 조카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마저도 쉬이 사라져버리고, 위로 받지 못한다. 그 어디에도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는 한스는 결국 물에 빠져 죽은 채로 발견된다.
수레바퀴에 깔릴까 두려워하다 그 수레바퀴를 벗어나 만난 것은 패배자의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오늘 날의 모습과 꼭 같은 모습에 100년 전의 삶도 조금도 다르지 않다 느낄 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랄 결국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하는 수많은 현대의 사고가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게 되면 한스는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적어도 작가는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가장 유명한 출세작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노년에 이름을 숨기고 쓴 작품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쩌면 비슷한 이야기를 담은 성장 소설일지만 그 속에서 작가는 철저히 내면에만 집중할 뿐 주인공인 데미안과 싱클레어를 둘러싼 구조나 환경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자아의 철저한 고민과 그렇게 구축한 자아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헤르만 헤세의 생각은 과연 옳은 것일까?
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88만원 세대의 비정규직 신세를 전전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 앞에 기성세대가 하는 공허한 말과 같지 않은가?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잊어버리고 내면에만 집중하는 것, 구조적 모순을 개인적 문제로 치환시켜 본질적 문제해결은 회피하는 태도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와 같은 태도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심화되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처해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영화 [설국 열차] 속 주인공들처럼 열차를 전복시켜야 그 지루한 싸움은 끝이 난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를 뒤쫓는 수레바퀴를 부셔 멈출 때에라야 진정한 자아를 찾아 자유롭게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