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잠시 작은 시골마을에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마을이 산중턱에 있어서 겨울이면 유독 눈이 많이 내리던 마을이었다.
눈이 내리면 쉬지 않고 내려서 산과 도로가 모두 눈에 덮였다.
어느 해 겨울인가는 눈이 너무많이 걸으면 무릎까지 눈이 쌓였다.
집 앞의 화장실도 걸어서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가 다니는 도로와 사람이 다니는 샛길까지 모두 눈에 덮여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때의 고요함과 적막감, 그리고 그 고요와 적막이 중는 평안함……
지금은 너무나 복잡한 곳에 살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차와 사람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그 시기와 환경, 그리고 그 때 느꼈떤 마음이 떠오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란 책을 읽으며 다시금 눈 덮인 작은 시골마을을 다녀왔다.
이 책을 열면 주인공 시마무라와 함께 기차를 타고 눈 덮인 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냐가 다가와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처녀는 창문 가득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듯,
역장님, 역장님 –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온 남자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감싸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을 내려 넢고 있었다.
벌써 저렇게 추워졌나 하고 시마무라가 밖을 내다보니, 철도의 관사인 듯한 가건물이 산기슭에 을씨스럽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 빛은 거기까지 채 닿기도 전에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P7)
시마무라는 눈 속 마을로 인도하는 기차 안의 맞은편에는 병자를 간호하는 애달픈 여인 요코가 앉아 있다.
시마무라의 목적지는 눈 덮인 나가타현의 한 온천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예전에 만났던 고마코라는 여자를 찾아오는 길이다.
그러나 고마코를 만나러 오면서도 시마코는 계속해서 요코가 신경이 쓰인다.
작 년에 시마무라는 우연히 눈 덮인 시골마을 여관에 머무르다가 19살의 게이샤 수업을 듣고 있는 고마코를 만난다.
(소설에서는 고마코는 시마무라는 다시 만난 후 199일만의 만남이라고 한다.)
고마코는 도쿄에서 결혼을 했었던 경험도 있으나 무슨 사연이 있는지 이 곳 시골마을에서 게이샤 수업을 듣고 있다.
그녀는 의외로 음악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마무라는 그런 그녀와 정을 나누는 만남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고마코는 이미 게이샤가 되어 있었고 매일같이 술자리에 불려 나갔다.
그리고 술에 취해 틈틈히 시마무라가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아온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시마무라 역시 그의 특유의 허무적인 생각과 표현으로 코마코를 바라본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으며 고마코의 친구인 요코를 생각한다.
이 소설은 눈 덮인 시골 마을의 풍경묘사와 함께 세 남녀 사이의 심리를 저자의 특유의 감각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무심한듯 서로를 그리워한다.
이 소설에서는 눈 덮인 일본의 온천마을 풍경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 역시 뛰어나다.
특히 시마무라를 향한 고마코의 마음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과연 남성이 어떻게 저렇게 여성의 심리를 잘 묘사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힘들어요. 당신은 이제 도쿄로 돌아가세요. 힘들어요”
힘들다는 건 여행자에게 깊이 빠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일까? 아니면 이럴 때 꾹 참고 견뎌야 하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여자의 마음이 여기까지 깊어졌나 보다 하고 시마무라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만 돌아가세요”
“실은 내일 돌아갈까 생각중이야”
“어머, 어째서 돌아가려는 거죠?”하고 고마코는 눈이 번쩍 뜨인 듯 얼굴을 들었다.
“내가 계속 있어봤자 당신을 어떻게 해줄 수도 없잖아?”
멍하니 시마무라를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격한 어조로,
“그게 틀렸어요. 당신은 그게 틀렸따고요”하고 애타는 표정으로 일어나 느닷없이 시마무라의 목에 매달려 몸부림을 치다가,
“당신은 바로 그렇게 말하는 게 틀렸어요. 일어나요. 일어나라니까요”하고 중얼거리며 제풀에 넘어졌다. 광기마저 띠고 몸이 불편한 것도 잊었다.
그러고 나선 따스하게 젖을 눈을 떠,
“내일은 정말로 돌아가세요”라고 나직이 말한 뒤, 머리카락을 주었다. (P70)
이 소설의 압권은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에 불이 나는 장면이다.
눈이 녹고 다시 눈이 오기 전의 짧은 시기의 어느 날 저녁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다시 만나 마을을 걷는다.
유난히 하늘에 은하수가 펼쳐지던 그 밤, 마을 사람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인 고치창고에서 불이 난다.
그리고 그 불 속에서 요코는 2층에서 떨어진다.
고마코는 시마무라의 품 속에서 빠져나가 그 불 속으로 들어가 요코를 데리고 나온다.
저자는 이런 급박한 상황을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낸다.
불은 영사기를 세워놓은 입구 쪽에서 난 듯, 고치 창고의 절반쯤은 이미 지붕도, 벽도 다 타버리고 없다. 기둥이며 대들보 같은 골격만이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판잣지붕, 벽, 마루가 전부인 텅 빈 창고일 뿐이어서 안에서는 연기도 별로 나지 않았따. 충분히 물이 뿌려진 지붕도 더 이상 타는 것 같지 않은데도, 불길은 계속 번져 엉뚱한 곳에서 불꽃이 생겼다. 석 대의 물펌프로 허둥지둥 끄려고 하면 일시에 불똥이 치솟고 검은 연기가 일었다.
불똥은 은하수 속으로 퍼져나가면서 흩어져 시마무라는 또 한번 은하수 쪽으로 끌어올려지는 느낌이었다. 연기가 은하수로 흐르는 것과 반대로, 은하수가 쏴아 하고 흘러 내려왔다. 지붕을 비껴난 펌프의 물줄기 끝이 흔들려 물안개처럼 희뿌연 것도 은하수 빛이 비추기 때문인 것 같다. (P148)
물 속에서 일어나서 은하수로 닿으려는 불꽃과 연기가 어쩌면 시마무라와 고마코, 요코 안에 있었던 감정과 사랑이었을까?
계속해서 뿌려지는 물주기는 허무의 감정일까?
그리고 그 허무 속을 뚫고 올라오는 불꽃처럼 이들의 사랑은 은하수에 닿았을까?
이 책은 노벨상 수상작가인 저자가 노년에 한 일본의 눈 덮인 시골 마을에서 쓴 책이다.
이 소설을 쓰고 저자는 다음 해에 자살을 한다.
사람의 인적인 끊긴 눈 덮인 시골마을에서 73세의 노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나간 사랑과 감정을 생각했을까?
그리고 그 사랑과 감정이 모두 사라지게 하는 허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작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까지 자신이 머물렀던 그 눈 덮인 시골마을로 데려가는 마력의 필치를 뽑낸다.
그리고 나 역시 소설을 읽는 동안 그 필치에 끌려 눈 덮인 일본의 한 온천마을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