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의 자아들의 모습

오래 전부터 러시아 소설들을 즐겨  읽었다.

 

특히 톨스토이와 도스트예프시키의 소설들을  좋아했다.

 

톨스토이와 도스트옙스키는 매우 비슷한 작가이다. 

 

둘 다 인간 영혼 속의 갈등과 신에 대한 탐구의  내용의 소설을 섰다.

 

하지만 둘의 분위기는 너무나 다르다. 

 

톨스토이 소설의 분위기가 매우 낭만적이고  탐미적인데 반하여 도스트옙스키의 소설은 매우 음침하며 어둡다.

 

마치 비오는 날 저녁 도시의 뒷골목에서 음란한  광고의 네온싸이 조명 아래 서 있는 느낌이 든다. 톨스토이에게 있어서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은 인간의 내면에서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발견은 종교적인 색체가 강하다. 

 

그러나 도스트옙스키에게 있어서 그런 발견과  탐구는 사치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하루의 삶에서 그의 내면에서  자신을 무너뜨리려 다가오는 어둠과의 절박한 삶이 전부였다.

 

그에게 있어서 글이란 인간 내면 안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치열한 싸움터을 묘사하는 것이였다.

 

 

 

도스트옙스키를 처음 접한 것은 그의 소설 죄와  벌을 통해서이다.

 

죄와 벌을 읽었을 때 한 소설가가 이처럼  예리하게 인간의 내부를 파해칠 수 있다는 것에 감탄을 했었다.

 

그 감탄은 까마라조프네 형제들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 소설은 4부작으로 이루어진 긴 소설이다. 이  소설은 타락한 한 인간이 표드로 빠블로비치라는 한 인물과 그의 세 아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 미완성 작품이다.

 

도스트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까마라조프네 가족을  통해 한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그 본성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처절한 내면의 갈등을 소설로 그리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까라마조프가는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의 싸움의 장소이며 자신의 내면의 단면이다.

 

 

 

까라마조프가에는 3형제가 등장한다. 자존심이  쎄며 미련하리만큼 직선적이고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를 파멸해가는 첫째 미쨔(드미뜨리 표드로비치), 무신론자로서 스스로  신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여서 무신론자일수밖에 없는 둘째 이반(이반 표드로비치), 그리고 종교적이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막내  알료사(알렉세이 표드로비치)…… 이들은 모두 도스트옙스키의 다른 내면의 모습인 것이다.

 

 

 

 

 

소설은 육체적 쾌락과 물질적 부만을 추구하는  표드로 빠블로비치가 두 아내에게서 배다른 3형제를 낳으면서 시작한다. 그는 두 아내와 헤어지고 3형제 역시 외가와 친척에 맡기고 자신은 오직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산다. 3형제가 장성하여 아버지에게 돌아오고 아버지와 첫째는 금전문제로 원수가 된다. 또한 그들은 그누센까라는 여자와  삼각관계를 이룬다. 이런 갈등 속에서 극도로 흥분한 미짜는 아버지의 집에 뛰어 들어 가다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살인 누명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심리 묘사는 한층 더 복잡하고 난해하다.

 

 

 

첫째 아들 미짜는 어쩔수 없이 세상의 정욕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묘사해 주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정욕으로 타락으로 끌려 가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인간내면의 모습을 보여 준다.

 

 

둘째 아들 이반의 내면은 철저한  비관주의이다. 그는 당시의 귀족들과 종교인들의 그 외식에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신론의 길을 택하며 모든 것을 비관하고  비웃는다. 

 

 

 

셋째 아들 이반은 내면의 순수성을 가지고 잇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순수성은 어쩌면 깨어질 가능성을 충분히 포함한 연약한 순수성이다. 그는 여린 양심으로 조그만한 양심의 가책에도 괴로워한다. 

 

 

 

 

 

어쩌면 이 세 아들은 표드리비치라는 타락한 육체  안에 도스트예프스키가 가지고 있었던 세 가지 성향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내면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