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무모한 순정과 열정과 도전에 대한 아련한 향수
‘외국의 문학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한다는 것은 곧 한 문화를 다른 문화로 옮기는 것과 다름 없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김욱동 역, 민음사, 2003)를 번역한 김욱동 교수는 <역자의 말>에 이렇게 말했다. 사실이다. 문학 작품의 힘은 위대하다. 한류 문화 열풍이 몰고온 유커 시장이 우리나라의 내수에 큰 영향을 미치듯, 그리스의 대표 산업이 바로 관광 산업이듯, 훌륭한 문학 작품들은 그 나라의 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터키를 대표하는 작가 오르한 파묵은 서양에 터키의 문화를 전파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파묵은 이스탄불의 풍경과 문화를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려냈다.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들과 그들의 삶을 그려냈다. 오르한 파묵이 이라크 작가였다면 미국은 이라크를 쉽게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닉 캐러웨이라는 화자가 자신이 젊은 시절 만났던 개츠비 인물에 대해 회상하며 써내려간 소설이다. ‘제이 개츠비’라 불리우는 그의 실제 이름은 ‘제임스 개츠’. 부모님은 다코타 북쪽에 사는 아주 가난한 농부들이었다. 가난한 중서부 출신인 개츠비는 자신의 열악한 상황을 이겨내고 성공하리라는 대한 확신을 갖고 운명을 쫓아 16살에 집을 나온다. 어느 날 슈페리어 호수에서 파도에 휩쓸린 요트를 발견해 구조했는데 그 배의 주인은 댄 코디라는 백만 장자였다. 그에겐 일생일대 절호의 기회였고, 이후 그와 함께 5년간 세상을 항해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 이때 이름도 제이 개츠비로 바꾸면서 댄 코디에게 옷 입는 법, 신사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법과 같은 상류층의 교양과 예절을 배운다. 댄 코디가 죽자 그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지만 이내 댄 코디의 가족들에게 모두 빼앗겨 버린 개츠비는 군 장교로 자원한다. 켄터키 주 캠프 테일러에서 군 장교로 훈련을 받으면서 한 사교 파티에서 데이지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이내 가난한 자신의 신분 탓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만 남긴채 떠난다. 이후 해외로 파병되어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데이지는 톰 뷰캐넌이라는 부유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한다. 5년이 지난 후 백만장자가 되어 돌아온 개츠비는 데이지가 사는 <이스트에그>의 맞은편 <웨스트에그>에 거대한 저택을 구입한다. 이후 혹시 데이지가 찾아오길 바라며 끊임없이 거대한 사교 파티를 연다. 그녀를 항상 기다리면서.
둘의 연결고리가 된 것은 소설 속 화자인 닉 캐러웨이. 데이지의 먼 사촌이었던 그는 개츠비의 이웃집에 산다. 예일대를 졸업했으나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채권 중계업을 하기 위해 동부 지역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우연히 개츠비의 옆집에 세를 들어 살게 된다. 데이지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사교 파티를 열던 개츠비는 캐러웨이의 존재를 알게되었고, 그를 자신에 파티에 오도록 초대장을 보내어 접촉을 시도한다.
“I’m Gatsby”
그는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기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미소였다. 영원히 변치 않을 듯한 확신을 내비치는, 평생 가도 네댓 번밖에는 만날 수 없는 보기 드문 미소 말이다.
캐러웨이는 개츠비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단번에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 개츠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개츠비가 풍기는 그만의 아우라(Aura)같은 것이었다. 처음 만남부터 개츠비는 캐러웨이에게 친근하게 대한다. 스스로를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재산을 상속 받았으며,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고 소개한다. 처음엔 이런 개츠비의 태도가 뭔가 수상하고 의뭉스러운 느낌이다.
“잘 있었소, 형씨(Old sport). 오늘 나하고 같이 점심이나 합시다. 제 차로 함께 갈까 생각했소만.”
둘의 첫 만남 이후 개츠비를 캐러웨이에게 점심을 같이 하자며 제안한다. 개츠비는 늘 캐러웨이를 부룰때 ‘형씨’라는 칭호를 붙였다. 원문으로는 ‘Old sport’. 번역한 출판사마다 ‘형씨’, ‘친구’, ‘자네’, ‘여보게’ 등으로 해석한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조금은 낡은 단어인데 이를 어떻게 번역 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주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개츠비의 번역은 민음사의 김욱동, 문학동네의 김영하 그리고 열림원의 김석희인데 그들은 각각 Old sport란 단어를 ‘형씨'(김욱동, 김석희), ‘어이 친구'(김영하)쯤으로 번역한다. 김욱동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김석희는 원문에 충실하면서 한국적 어감을 잘 살린 번역을 그리고 김영하는 소설가답게 의역을 상당히 사용하면서 반말투를 쓰는 등 젊은 느낌의 번역을 살렸다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한다고 했을때 친한 미국인 친구들로부터 Old sport을 어떻게 번역할지 물었다고 한다. 그만큼 Old sport는 이 작품의 분위기와 개츠비의 캐릭터를 좌우하는 중요한 단어다. 어떤이는 Old sport가 Oxford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개츠비가 즐겨 썼다는 주장도 있다. 평소 자신의 신분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서 스스로 옥스퍼드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개츠비의 성격으로 볼 때 일리있는 말이다. 물론 정확한 의도는 작가만이 알 수 있겠지만.
– ‘개츠비가 왜 위대한 줄 잘 모르겠다’
실제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읽거나 영화로 접한 주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긴, 돈이 없어 짝사랑 하던 여자를 다른 부유한 남자한테 빼앗겨 놓고선, 5년만에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서 ‘이제 내가 부자가 되었고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어서 저 남자에게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말하고 나에게로 와! 저 남자를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꼭 이야기 해야만해’ 이런식의 논리는 정말 찌질하기 그지 없다. 유난히 과거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면서 데이지에게 남편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반드시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라고 강조하는 개츠비, 내가 봐도 멋지진 않았다. 결국 개츠비의 집착에 실망하고 우연한 사고로 사람을 치여 죽이게 되면서 궁지에 몰린 데이지는 다시 자기 살길 찾으려고 개츠비를 배신한다. 끝까지 데이지의 전화를 기다린 불쌍한 개츠비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열림원의 김석희는 『위대한 개츠비』를 “시대의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위대한 착각을 하는 위대한 남자”라고 다소 비꼬면서 ‘대단한 개츠비’로 번역하고 싶었다고 한다.
결국은 『위대한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하는 개츠비의 이루어지지 않은 로멘스 소설로 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 작품을 상투적인 로멘스 소설의 얼개쯤으로 보기엔 너무 아깝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품 가치를 두고 평판이 엇갈리기도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1920년대, 즉 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사회의 풍경을 너무나 잘 묘사해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미국 사회는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연일 샴페인을 터뜨렸다. 실제 1922년부터 경제 대공항이 온 1929년 사이 주식 수익률은 무려 108퍼센트에 달했다고 하니, 작품 속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예일대를 졸업하고 채권 판매를 하러 뉴옥으로 건너온 배경도 이러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러한 눈부신 경제적 성장의 이면에는 도적적 타락과 부패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 곳곳에는 이런 사회 비판과 풍자적인 요소들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블랙웰 아일랜드를 지날 때 백인 기사가 운전하는 리무진 한 대가 우리 앞을 지나갔는데, 그 안에는 맵시 있게 차려입은 흑인 남자 둘과 여자 하나, 모두 세 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이 거만하게 경쟁이라도 하듯 우리를 향해 달걀 노른자위 같은 눈동자를 굴리는 것을 보고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캐러웨이가 개츠비의 차를 타고 점심을 먹으러 시내로 나가는 장면에서 스쳐지나가는 한 문장이다. 아직은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심각했던 이 시기에 백인의 운전 기사가 모는 차에 흑인들이 파티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돈만 있으면 백인도 흑인의 시중을 들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야기 전개와 큰 상관이 없는 장면이었기에 처음엔 그냥 흘려보냈었지만 두 번째 읽었을때 비로소 이 문장을 발견했다. 영화에서도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담았다.
– 낭만적 이상주의자 제이 개츠비
개츠비는 서부 출신의 가난한 빈농의 아들이었다. 성공에 대한 열망과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세상을 향해 달려나갔고, 운명적인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자신의 현재 모습으로는 그녀를 만족시킬수 없어 기다림 끝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란듯이 성공해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를 둘러싼 주변에는 온갖 부정과 퇴폐로 물들어있지만 그는 낭만과 순수함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소설속 화자인 닉 캐러웨이도 이러한 그의 모습에 반해서 그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던것 같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속절없는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삼은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그 인간들은 썩어 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제이,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이 소설을 단 한 줄로 요약해달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이라고. 개츠비에게는 데이지라는 목표가 있었고, 데이지에게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지향이 있었다. 지친 윌슨을 엉뚱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몸이 뜨거운 그의 아내는 달려오는 자동차를 잘못 보고 제 몸을 던진다. 작가인 피츠제럴드마저도 당대의 성공과 즉각적인 열광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 표적들을 향해 쏘아올린 화살들은 모두 엉뚱한 곳으로 알아가 꽂혔다. 난데없는 곳으로 날아가 비로소 제대로 꽂히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 소설가 김영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