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단편집 <여성혐오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1975년)과 <바람 속에서 서서히, 서서히>(1979년)을 합쳐 내놓은 책이다. <여성혐오>는 오히려 단편보다 콩트에 가깝다. 몇 쪽이 되지 않는 분량으로 이야기를 끝내는데 그 짧은 글 속에 느껴지는 섬뜩함과 긴장감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이 분위기에 익숙해서인지 다음 단편집인 <바람 속에서>를 읽을 때는 처음엔 약간 늘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단편들이 내품는 공포와 살의와 살인은 대단하다.
모두 29편이다. <여성혐오>가 19편이고, <바람 속에서>가 12편이다. 분량은 <바람 속에서>가 더 많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성혐오>에 실린 이야기들이 단편소설보다 콩트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처음 전작에 실린 단편을 읽을 때 일본작가 호시 신이치의 초단편 소설이 연상되었다. 하이스미스가 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짧으면서 강한 인상을 주는 점에서 유사하다. 물론 그녀가 품어내는 냉기가 더 강한 것은 사실이다.
가장 먼저 만나는 단편인 <손>은 관용구를 비틀어 이야기를 만들었다. 언어를 사실과 연결시켜 사건을 만들어내고, 한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간결한 내용이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여성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과 현실을 짧게 그려내면서 냉혹하게 마무리한다. 이 소설들에 나오는 여자들을 보면 소위 말하는 남자의 등골을 휘게 하는 여자들이다. 그 한계가 어느 곳인가에 따라 비등점이 다르지만 그 결말은 모두 비슷하다. 그녀들로부터 벗어난 남자들의 편안함이 왠지 모르게 더 섬뜩하다.
<바람 속에서>는 읽다보니 스티븐 킹의 소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들이 있다. <연못>과 <바람 속에서 서서히, 서서히>가 그것이다. 전작이 초자연적인 공포를 조금씩 풍기면서 파국으로 이끈다면 후작은 옥수수 밭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시체의 모습이 그를 생각하게 만든다. 시간 순으로 따지면 하이스미스가 먼저다. 하지만 나에게 먼저 다가온 작가가 킹이다 보니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어쩌면 킹이 그녀에게 더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더 올라가면 앨런 포로 귀결될 수 있지만 아직 포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기에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자.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그려내는 일상의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다. 세밀하고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지만 간결함 속에 담긴 현실은 공포와 두려움과 살의와 탐욕과 위선과 집착 등이 잘 살아있다. 평생 아이디어가 고갈된 적이 없다고 고백한 그녀의 글답게 현실에서 뽑아낸 이야기들은 냉혹하고 도발적이고 풍자적이다. 일상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급격한 반전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대단한 필력이다. 이런 매력 때문에 수많은 영화계의 거장들이 그녀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각 이야기마다 평을 달아 분석할 수 있지만 그녀가 만들어낸 현실에 잠시 머리를 담구고, 일상 속의 일상 밖을 경험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