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은 도망치듯 단어들을 훑고 훑어 이야기 마지막 마침표에 이르렀을 때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나에겐 재미가 없었다. 어쩔 수 없다. 대문호의 책이라도 일단 내 안에서 작가와 썸을 타지 못한다면,
나에게 주인공들 사이의 케미가 그닥 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지루하고 재미없던 책 속 인간들이 뭔가 아쉬운 듯… 책장을 덮자 내 안에서 그림자 인간들이 되어 서성인다.
@전쟁 중 부상으로 인해 성불구가 된 30대 중반 미국인 제이크 반스.
유머러스하지도 그렇다고 외모가 준수한 것 같지도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하여튼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하지만 성불구의 그가 브렛과 우정이자 사랑인, 아니 우정도 사랑도 아닌 관계 속에서 소리없이 신음하는 모습이 씁쓸하다. 그를 떠올리면 무엇보다 투우장에서 거세 당한 소들이 황소들과 뒤섞여 경기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 그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을지 상상해보게 된다.
@제이크와 사랑에 빠졌으나 제이크의 상처로 인해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하고 또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감정을 나누는 영국인 브렛.
자유분방하여 아름답지만 또 자유분방하기에 상처 그 자체가 되는…
자신의 비참한 심경을 한숨 섞인 목소리로 고백하는 것이 결국 제이크에게만 열어두는 사랑의 채널로 생각하는 이 여자가…
난 측은하면서도 짜증스러웠다. 그 이기심이 밉다.
@브렛을 자신 곁에 붙들어둘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호탕한 척 하지만 결국은 감정이 폭파하는 브렛의 약혼자 마이클.
브렛의 매력, 그 가치와 힘을 알기에 그녀의 방종마저도 품고자 했지만 그럴 깜냥은 안되어 술이나 퍼마시는 이 남자도… 측은하고 짜증스러웠다. 그 가식이 우습다.
@브렛에게 집요하게 집착하는 유태인 로버트 콘.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며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고 또 그 길로 향하고자 함은 지극히 순수한 아름다움이지만… 그 목적이 되는 대상이 손사래를 친다면 결국은 추한 미련.
@브렛의 마음을 일순간 사로잡은 19살 투우사 로메로…
아 투우사. 보는 이들은 피가 끓는 즐거움에 도취되어 그 열기를 즐기지만 정작 투우사는 그 수많은 군중에 쌓여 혼자만의 위험 천만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그 고독. 브렛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 들 그가 머물 곳은 관중속 다른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삶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오가는 흙먼지 쇼 무대인 것을…
여하튼 삶의 방향성도 가치관도 상실한 채 낯선 타국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삼십대 중반 미국인, 영국인들의 웅성거림은 다소 지루하게 와 닿았으나
투우사로서의 신념과 정신 세계가 견고한 로메로와의 만남은 별다른 대화 없이도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나 스스로가 이야기와 합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1920년대 무덥고 눈부신 스페인의 여름,
각자만의 불안감, 우울증을 만취 상태로 버티며 어떻게든 적절히 살아내 보려는 이들의 무리가 내 눈 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것이 그냥 보기 싫었나보다.
태양은 다시 떠오르지만 여전히 혼돈스럽고 정처없는 방황은 계속되는 상황이 내 마음을 우울케 하는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