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그 어떤 고매한 목적과 드높은 이상에도 불구하고
매일 매일 먹고 정을 나누는 것 그리하여 나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건강하게 지켜가는 것. 그 이상의 또 그 이하의 것도 아닌 듯 하다.
먹는 것을 잃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전쟁 때, 보릿고개 때 겪은 굶주림이라는 것이 막연히 위 내부가 다소 건조해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일까…해하며 쉽게 짐작하지 못한다.
단순한 허기가 아닌 굶주림은 내 상상력으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러나 요리를 묘사한 이야기는 설사 그것이 초리소, 세라노 칠레고추, 아니스, 몰레, 커민과 같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재료들이고 사진으로조차 본 적 없는 음식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 요리가 풍기는 냄새는 물론이고 한 입 베어물기 전 침샘을 자극하는 그 느낌, 식감, 혀가 느끼는 자극,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음식의 질감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리게 되는 놀라운 상상력이 발현된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멕시코 요리 12가지가 티타의 인생과 함께 버무려져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으로 내 앞에 펼쳐졌다.
주인공 티타는 막내딸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가족 전통 때문에 연인과 결혼하지 못하고 그 연인을 형부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큰 고통을 감내하는 여성이다.
이 책에는 1월부터 12월까지 주인공 티타가 가족의 역사 속에 자리해 온 의미있고 중요한 요리 12가지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게 되는 내용이 담겨있다.
전통의 레시피에 그녀가 겪는 감정의 에센스를 더하여 다양한 환타지가 일상과 뒤섞이는 것이 이 책의 백미이다.
1월의 크리스마스 파이로 시작하여 12월의 호두 소스를 끼얹은 칠레고추 요리까지…
12가지 요리는 결국 독자들 마음 각각의 냄비 속에서 뒤섞여 달콤쌉싸름한 인생의 맛을 여운으로 남긴다.
가슴 어디론가 이어지는 목구멍에 여운이 남는 기묘한 느낌. 싫지 않다.
내가 만난 첫 요리 영화가 바로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이었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는 아마 19금이 아니었을까 싶고..
책 속에서 헤르트루디스가 티타가 만든 요리를 먹고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욕정을 참지 못해 샤워를 하던 중 나체로 뛰쳐 나와 몸에서 열기를 내뿜으며 어디론가 뛰어가는 장면이 너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있었는데, 책 속의 장면이 영화상에서 너무 제대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뒤늦게 알게 되었다. 요리를 통해 분출되는 성적인 욕망 뿐만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갈망, 불륜에 대한 죄의식과 갈등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 등… 2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영화로서나 책으로서나 무거울 수도 있는 그런 주제들이 요리를 통해 일상의 친숙한 것들로 필터링되어 친근감마저 든다.
십대 시절 이 영화를 통해 초콜릿의 달콤 쌉싸름한 맛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20년이 훌쩍 흘러 달콤 쌈싸름한 인생길 위에서 두리번 거리고 있는 내 모습. 마치 티타가 만들어 낸 환타지는 아닌가 싶어 헛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