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은 했다. 쉽게 읽히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있다. 너무나도 선혈 낭자한 장면들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살인들이다. 살인을 하고, 머리 가죽을 벗기는 그들을 보면 공포영화 속에서 걸어 나온 괴물처럼 보일 때도 있다. 영화 속에선 괴물의 형상이라도 하고 있는 반면에 이들은 백인, 흑인, 인디언 등으로 구성되어 바로 달아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 더욱 무섭게 다가온다. 그 주저 없는 총질과 강간과 폭력들이 말이다.
열네 살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소년은 끝까지 이름이 없다. 그냥 소년이다. 그는 서부를 떠돌며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른다. 무서울 것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이런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온다. 자신들의 군대에 가입하면 멕시코에서 큰 한 건을 잡고 노략질도 거대한 부를 얻을 수 있다고. 그래서 군에 입대한다. 물론 정식군대는 아니다. 그런데 이 군대가 인디언의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난다. 대부분이 죽었지만 몇몇은 살아남았다. 그는 황야를 떠돌다 감옥에 갇힌다. 이 곳에서 살육의 여행을 떠나는 글랜턴 무리에 합류한다. 여기부터 정말 피로 가득 차게 된다. 원래 계약한 인디언의 머리 가죽을 가져오면 돈을 받기로 했지만 그들은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관계없는 사람들의 머리 가죽을 벗긴다. 처음 이 장면들을 만나면서 왜 이러지?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곧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계약의 이행이 아니라 살인과 피와 폭력과 강간과 돈이었음을 알게 된다.
코맥 매카시의 작품을 두 번째로 접하지만 그의 글 속에선 항상 원초적인 폭력이 등장한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감정이 없는 것 같다. 부상당한 자를 총으로 살인하고, 자신의 다리를 관통한 화살을 손으로 밀어내고, 어린 아이를 귀여운 듯이 보다가 머리 가죽을 벗겨버린다. 이런 고통스럽고 끔찍한 장면들을 작가는 감정 이입 없이 건조한 문장으로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 차단된 감정 속에서 보게 되는 살육의 풍경은 그 끔찍함을 현실의 공간으로 끌고 오기보다는 다른 세계의 현실로 치부하게 만든다. 하지만 잠시만 고개를 들고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면 그 처참한 장면들이 과거 속 실재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른다. 이런 안도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이상한 것일까?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 한 명 있다. 바로 판사다. 거대한 덩치에 탁월한 그림 솜씨, 언어, 춤 솜씨 등을 가지고 있다. 이런 특징보다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살육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말하는 인물이란 점이다. “전쟁은 바로 신이다.”라는 궤변을 말하며 그 살육을 즐기는 그를 보면 무감각하게 살육을 지휘하는 글랜턴이 오히려 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이성을 놓고, 폭력과 살인의 본능을 충실히 따르는 그들 속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때문인지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살아남는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힘든 것을 꼽으라고 하면 문장이다. 살육 장면도 쉽지 않지만 감정 이입되지 않은 문장들은 건조하고, 간결하게 사실만 나열하는 문장에선 읽는 리듬이 뚝뚝 끊긴다.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면 다음엔 대화 구분이 없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을 쓰면서 봐야한다. 많은 집중을 요구하는 소설이다. 이런 문장이나 설정에 익숙해지면 이때부터 속도가 붙지만 무시무시한 살육의 현장에 압도당한다. 그 무법의 시절은 이전에 본 모든 서부영화를 뒤로 날려버린다. 영화들이 단지 보여주기 위해 예쁘게 꾸민 장식물처럼 느껴질 정도다. 다시 한 번 더 읽어야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