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따뜻한 소설이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덮는 순간 그 따스함이 전달된다. 비록 처음 예상한 전개 방식은 아니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한 청년의 성장기이자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큰 웃음을 전해주지는 않지만 잔잔한 웃음을 입가에 떠올려주면서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돌아보게 된다.
지하철 잡상인들을 자주 본다. 어떤 분은 능숙한 정도가 대단하여 베테랑임을 알 수 있고, 어떤 날에 물건을 팔러 온 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주저함으로 오히려 나 자신이 불안감을 느낀다. 보통 잡상인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틀 때면 짜증을 내는데 자신감 없이 주저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열심히 하라고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사연을 모르는 상태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동하는 순간에 만나는 잡상인은 역시 피곤하고 짜증나는 존재일 뿐이다.
잡상인들이 역 안에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번갈아 가면서 다른 전철을 타고 다니며 물건을 파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 번은 바람잡이를 내세워 물건을 파는 현장을 보기도 했다. 어떤 순간은 그들이 내세우는 물건에 혹해서 나도 하나 사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 되지 않는 천원이란 금액이 주는 매력이다. 멋지게 상품을 광고하는 잡상인들의 말과 그 상품이 나에게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설명과 시연은 순간적으로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수많은 지하철 승객들이 이 물건들을 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가끔 이들이 판매하는 물건이 점포에서 조금 더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을 본 적도 있으니 말이다.
잡상인에 대해 앞에서 길게 풀었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박철이’(‘박철’이 아니다)도 원해서 잡상인이 된 것은 아니다. 자신을 키워준 조지아 여사의 협박에 못 견뎌 나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지하철 잡상인 계의 전설과도 같은 미스터 리의 문하생이 된다. 그의 판매실적은 경이적이라 모든 잡상인들이 그 비법을 배우길 원할 정도다. 그의 제자가 되어 그가 판매하는 것을 보지만 특별히 뛰어난 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물건을 팔아보니 결코 녹녹한 직업이 아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판 것이 단 하나인 천 원뿐이니 말이다. 그 천 원조차 농아인 여자에게 줘버린다.
앞부분이 지하철 잡상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낯익지만 낯선 풍경을 보여주면서 시선을 끈다. 미스터 리의 비법을 전수받아 대박을 터트리려고 하는 노력을 보여주지만 쉽게 이루어진다면 비법이 아닐 것이다. 여기저기서 다른 잡상인들을 만나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사연들이 나온다. 전직 코미디언이었던 그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순간이자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위한 전 단계다. 그리고 그가 기록한 최저 판매금액을 받아간 농아 수지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의 분위기는 변한다.
철이가 수지에게 조금씩 끌리고 그녀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경제적 결핍에 시달린 사람에서 육체적 결핍을 가진 사람들로 무대는 옮겨간다. 농아인 수지나 그녀의 동생이자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효철이와 그의 약혼녀 지효로 말이다. 그런데 이 부족한 듯한 구성원들의 삶이 결코 불행하지 않다. 그들 사이에 사랑과 유대감이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틈새를 조용히 비집고 들어가 한 구성원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사랑과 이해의 과정이 후반부인데 앞부분과 분위기가 너무 바뀌어 조금은 아쉽게 느껴진다.
개성 강한 인물들이 가득한 소설이다. 판매왕 미스터 리와 할머니 조지아 여사나 삼농을 사랑하는 지효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사연이 가볍게 다루어지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좀더 깊이 있게 다루고, 전면에서 강하게 부각시키면서 에피소드들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으로 다가온 것은 역시 수지에 대한 철이의 사랑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준 그의 행동을 보면서 나의 사랑이 부끄럽고, 자그마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가 부럽다. 머리 싸매고 고민하면서 읽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면서 즐겁게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