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이 모인 곳이라면 절대불변인 소수권력의 착취구조…
왜 제 기억속에 이 책이 너무 재미있었던 책으로 각인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읽었던 동물농장은 뭔지 몰라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돼지가 두발로 서 있는 삽화가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니 말입니다. 이런 형국이다보니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면서 그저 조지 오웰과 그의 작품 [동물농장]을 좋아한다고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야 워낙 오래된 책이니 제 특기 “신간사서 구간만들기 신공”이 전혀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사놓은지 참으로 오래 되었는데, 이제서야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제 기억과는 꽤나 다를지언정 너무 훌륭한 책인 것 만은 틀림없네요. 정말 대단한 통찰이 녹아있는 소설입니다.
[동물농장]을 읽다보니 개미를 예로 설명하는 파레토(Pareto) 법칙을 떠올랐습니다. 어느 그룹, 어떤 구성원이건 80:20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 내용인데, 이를테면 개미를 100마리 놓아두면 그중 80마리는 적당히 일하거나 놀고 20마리만 열심히 일하더란 것이죠. 그런데 그 열심히 하는 20마리만 따로 모아두면 우습게도 그중 80%에 해당하는 16마리는 또 다시 어영부영 놀고 20%인 4마리만 열심히 일하더라 뭐 그런 법칙입니다. 비단 개미뿐 아니라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그 퍼센트가 80:20이냐 90:10이냐, 99:1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인간들은 그들 중 일부가 절대 권력층이 되어 대다수를 장악하고 통제해 왔습니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게도 대다수는 그 사실을 인지조차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권리와 인권이 제한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권력층을 옹호하는 아이러니한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계층적 착취구조는 너무도 폭넓게 퍼져있고, 너무나 당연시 되어왔고, 철저히 교육되어 왔기 때문에 이 구조는 어떤식으로든 쉽사리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묘사에 따르면, 동물들 만의 독립된 공간에서조차 이 법칙이 철저하게 지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동물들이 인간을 몰아내고 쟁취한 존귀한 자유는 곧 상대적으로 똑똑한 특정 무리에 의해서 서서히 독점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우유는 죄다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얼마 안 가서 밝혀지게 되었다. 우유는 매일 돼지들이 먹는 사료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과수원에서는 이른 사과가 익기 시작했고 바람에 떨어진 사과알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동물들은 그 떨어진 사과알들이 물론 평등하게 분배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날 그 사과알들은 모두 모아다 마구실의 돼지들에게 갖다줘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p35
이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동물들의 유토피아는 서서히 불평등과 착취의 장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착취의 대상인 대다수의 동물들은 착취계급의 철저한 선전과 왜곡된 정보전달에 의해 뭐가 뭔지도 모른채 혼미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런 흐름속에 급기야 애초에 세운 기본적인 합의사항을 어기고 동물들이 처형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서서히 그곳은 이미 그들이 원하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어있음을 실감합니다.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던 그날 밤 그녀가 오리새끼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 그러나 그 사회 대신 찾아온 것은, 아무도 자기 생각을 감히 꺼내놓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물들이 무서운 죄를 자백한 다음 갈가리 찢겨죽는 꼴을 보아야하는 사회였다.” p78
더 안타까운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 처절한 상황에서조차 “왜 그렇게 된 건지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계속 소수에 재화가 집중되고 의사결정권이 독점되어 가는데 그 구성원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란 말이지요.
#2. 정치적 배경하에 쓰여진 풍자인지 일반론적인 알레고리인지가 무어가 중요하리…
이 작품을 놓고 정치 풍자인지, 일반 우화인지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과 시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 작품 해설을 읽다가 짜증이 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해설만큼은 초반에 조금 의아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보니 참으로 적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풍자이자 우화라는 해석이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현세를 사는 우리에게 스탈린 당시의 러시아 정치에 대한 풍자가 뭐 그리 의미가 있을까 싶은 의문은 듭니다.
지금 시대의 [동물농장]은 마르크스 주의를 전혀 몰라도, 러시아 역사를 깡으로 몰라도 전혀 상관없을 만큼 우리 현실과 너무도 놀라우리만치 맞닿아 있습니다. ‘아, 이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 세상의 한계와 구조적 모순과 그속의 아픔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들었습니다.
인간을 몰아내고 자유의 세계를 구축한 동물들이 그들중 좀더 똑똑한 돼지들에게 지배권을 맡긴 것이 실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대안은 생각해 낼 수 없었겠지요. 그리하여 어느순간 재화와 권한이 특정 동물에게 집중되기 시작하고 평화와 균형은 깨지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시작은 지배욕과 권력욕으로 집중되는 지배계층 개개의 욕망으로 부터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통했고, 점점 정교화되고 노골적으로 제도화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특정 동물의 희생이 강요됩니다.
“어느날 농장의 필요에 의해 암탉의 계란을 주당 4백개나 외부로 팔기로 명령이 내려오고 이에 불복한 암탉들은 단체 행동에 들어갑니다. 인간세상에서는 ‘파업’, 또는 ‘데모’라를 용어로 대표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수뇌부인 돼지들은 음식공급을 차단하고 다른 동물들에게 옥수수 한알도 주지 말라고 명령하는 실력행사에 들어갑니다. 결국 상황에 항복한 암탉들은 명령을 받아들이는데 이 사건으로 암탉 여러마리가 죽고 이는 공식적으로 “콕시디아”라는 질명으로 죽은 것으로 발표됩니다.”
이거 뭐 상당히 익숙한 느낌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당시 묘사한 이 상황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너무나 흡사하게 반복되고 있는 일입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가치판단이나 정치적 입장을 밝히자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한치의 발전이나 개선이나 변화없이 그때 당시의 [동물농장]이 현실세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훌륭한 명작으로 평가받게 해 주는 힘이 아닐까 합니다.
정치 풍자면 어떻고 일반적인 알레고리이면 어떻습니까? 읽는 독자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뒤통수가 얼얼한 충격을 받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치에 대한 통찰을 얻으며, 생각지 못했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부조리에 대해서 한번쯤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역할을 한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3. 소수가 좌지우지 하는 판을 넘어서는 힘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 입니다. 구조적인 모순은 어떤 특정한 해결책으로 해소되기에는 너무나 뿌리가 깊습니다. 또한 각 계층의 이해득실이 뒤엉켜있어 풀리는 듯하다가도 다시 복잡해지는 실타레와도 같습니다.
이 소설이 훌륭한 점중 한가지는 이런 사회구조적 문제를 짚어내기만 하고 어쩔수 없다고 체념하고 고발하는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묘사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권력의 타락을 막는 단초는 그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동물들이 실제로 무슨일이 일어나고있는지 지켜보는것에서 출발합니다. 이로부터 인간과 돼지의 연합을 목도하고 심지어 얼마나 그들의 유대가 심각하던지 두부류가 명확하게 구분조차 안되는 상황임을 알게되는데 이르릅니다. 이를 통해 착취계급의 성실하고도 집요한 선전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공유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 어떻게 행동할것인가? 인데 사실 저는 어떤 행동이 온전히 옳은지에 대해 아직 의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이 인간들이 발버둥쳐온 결과물이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은 듯 합니다. 저는 그 역사 속에서 뚜렸한 답을 얻지못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