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이야기다. 첫 부분을 읽을 때 약간은 도식적인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진솔한 감정이 섬세하게 표현되었고 눈물샘을 자극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한 노인의 도보 여행인데 그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자신의 감정과 사람들의 기대가 뒤섞이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흔한 기적 이야기가 아닌 잊고 싶어 하거나 절대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삶이자 현재이자 미래다. 그것을 제대로 바라볼 때 이 소설의 감정은 증폭되고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성실하게 일하다 정년퇴직한 해럴드에게 한 통의 편지가 온다. 그 편지에서 모든 일이 시작한다. 그것은 20년 전 같은 회사에 근무했던 퀴니 헤네시의 편지다. 그녀는 암에 걸려 죽기 직전이다. 이때만 해도 그녀에게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전부였다. 주유소 아가씨가 암에 걸렸던 자기 고모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이후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그는 직선으로 8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가게 된다. 실제 잘못된 길로 간 것을 포함하면 1000킬로미터가 넘는 대장정이다. 우발적인 일에서 시작한 조그만 발걸음이 자신이 모르게 놀라운 순례로 바뀐 것이다.

 

많은 이야기기 해럴드를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그 배우자인 모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두 부부는 20년 동안 함께 살고 있는 남과 다름없었다. 부부였다는 흔적만 남은 상태에서 둘은 한 집에 살 뿐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 둘 사이에 어떤 큰 틈이 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틈새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알게 될 때 상실을 겪은 두 남녀가 어떤 보호색을 가지게 되는지 보게 된다. 오해와 비난이 자리한 곳에 묵묵한 견딤이 있고, 후회는 삶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결코 이 사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에 둘의 틈새는 좁혀지지 않는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던 해럴드에게 이 도보 여행은 새로운 삶에 대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기대를 몇 번이나 저버린다. 기대보다는 예상이란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겠지 생각하고 읽다보면 그 예상은 산산조각난다. 60대 노인이 충동적으로 도보 여행을 나섰을 때 제대로 여행 도구가 갖춰지지 않았다. 아마 그에게 현금카드가 없었다면 생각보다 더 빨리 여행이 끝났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른 방향의 여행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무대포다. 준비는 걷는 도중에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통해 하나씩 갖춰진다. 동시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는 현금카드를 비롯해 지갑과 손목시계 등의 물건을 집으로 보낸다. 개인적으로 첫 감동을 받은 대목이자 섣부른 예상을 하게 된 첫 대목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의 여행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는데 이것이 언론을 자극한다. 언론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어느새 그의 곁에서 수많은 순례자 무리가 생긴다.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무리에서 권력을 쥐고 싶은 사람이 생기고, 이를 따르는 무리도 역시 나온다. 상업적 목적에 의해 그의 도보 여행이 왜곡된다. 하지만 변함없이 그는 포기하지 않고 굳세게 걸어간다. 이때 다시 한 번 더 변화가 생긴다. 예상하지 못한 대목이다. 이런 예상 못한 장면들이 나오고 그 속에 해럴드의 진솔한 감정들이 솟아져 나올 때 잔잔한 울림은 점점 커진다. 반면에 기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독한 현실의 높은 벽이 자리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두 개다. 하나는 아들 데이비드가 물에 떠내려갈 때 해럴드가 신발끈을 묶고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럴드와 모린의 첫만남이다. 상실과 상처로 가득한 신발끈이라면 첫만남은 이것들을 깨끗하게 씻어줄 사랑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게 그거였어, 사랑. 별거 아닌 말이었지. 하지만 우리가 행복했기 때문에 웃겼던 거야.”(394쪽)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삶의 수많은 질곡을 겪고 아픔을 견뎌낸 이 노부부에게 별거 아닌 말이 환희에 찬 행복한 웃음을 전해준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흔하게 하지만 가장 그 원래 의미를 잊고 살아가는 별거 아닌 말 사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