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슬로잉’이라고 불렀다. 자전 속도가 느려지면 가장 먼저 중력에 문제가 생겼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도 변했다. 기존의 하루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 이 설정을 읽으면서 북극이나 남극에서는 실제 시계 시간과 일출몰 시간이 다르지 않나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중반 이후도 왜 이것이 문제일까 하고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중력이 무거워지면서 새가 떨어지고, 운동 능력이 떨어질 때도 말이다. 하지만 물고기와 고래 등이 죽고, 나무 등이 말라 죽을 때 이 ‘슬로잉’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조금 늦은 깨우침이다.
열한 살 줄리엣이 주인공이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에게 지구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이 슬로잉보다 이에 영향을 받은 부모 밑에서 사는 친구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이 알려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를 벗어나 다른 주로 옮겼다. 나중에 정부에서 실제 해가 떠있는 시간과 상관없이 기존 시계 시간을 표준으로 삼았을 때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익숙해진 24시간 대신 자연의 시계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정부에서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겠다.
작가는 이 엄청난 변화를 아주 담담하게 풀어낸다. 읽다 보면 큰 문제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조금만 차분히 생각하면 인류가 처한 위기가 아주 잘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SF이자 환경소설이다.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경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인류와 동식물 등의 멸종 위기를 경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종말론적 상황은 줄리엣을 둘러싼 성장을 다루는데 필요한 배경 중 하나다. 물론 단순한 배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읽기에 따라서는 더 중요하게 다룰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런 쪽에서는 SF적 발상에서 시작한 하나의 종말문학이 될 것이다.
줄리엣은 산부인과 의사인 아버지와 연기자 출신 엄마 밑에서 자란 평범한 소녀다. 슬로잉이 생기면서 절친이 다른 도시로 떠났고, 이 슬로잉이 고착되고 가속화되는 시점에 돌아와서는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이로 변한다. 이 변화는 줄리엣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력이 무거워지면서 생기는 문제가 나오고, 학교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만 다니지 않는 학생들이 늘어난다. 일상이 유지되지만 그 일상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이런 일상에서 줄리엣의 시선을 끄는 남자애가 등장한다. 세스다. 그의 엄마는 암에 걸렸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 용기가 부족한 그녀에게 세스는 아직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 거리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종교적 신념, 생태학적 신념 등으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바꾸는 사람들이 생긴다. 종말이 다가오는 듯한 환경의 변화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 불안은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게 만든다. 이 공격이 다시 그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만든다. 규칙, 법규 등이 작지만 큰 차이를 만든다. 작가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하루를 맞춰 생활하는 사람들의 장점을 보여주지만 점점 길어지는 한낮은 사람의 생물학적 한계를 조금씩 무너트린다. 긴 시간이 흐른다면 사람과 동식물들이 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시간 속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한 소녀의 성장 속에는 아버지의 외도도 들어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할 수조차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어머니에게 말해야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비밀로 남겨둔 것이다. 아버지의 거짓말도 하나씩 나타난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슬로잉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늘 있는 일이다. 단지 슬로잉이 이것을 부각시킬 뿐이다. 이런 자연과 생활의 변화는 한 소녀의 성장과 맞물리면서 잔잔하게 흘러간다. 너무 느슨하다. 그런데 가독성이 좋아 잘 읽힌다. 어떻게 보면 급격한 변화에 의한 종말론을 다룬 것보다 더 잔혹한 이야기다. 단계별로 별로 길지 않은 시간 속에 그 변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SF로 분류하고 싶다. 더불어 종말문학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