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역사소설의 귀환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싶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필두로 해서,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 그리고 이기호 작가의 <차남들의 세계사>, 최민석 작가의 <풍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간 우리 문학 작가들이 잘 다뤄오지 않던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풍년을 이루고 있다. 나는 <투명인간>, <소년이 온다>에 이어 세 번째로 <차남들의 세계사>를 읽었는데 제목이 자못 심각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웃픈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역사소설의 장점이 무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가독성이 뛰어나다. 내가 살아온 지난날과 소설에 등장하는 그것이 중첩될 때, 가독성은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기호 작가 특유의 블랙 유머가 덧붙여지면서 서사가 주는 재미는 스카이로켓처럼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잠깐 그런데 왜 그동안 우리 작가들은 이렇게 재밌는 현대사를 외면해 온 걸까? 얼마 전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대하면서 느낀 거지만, 그건 아마도 작가의 역량 탓이 아닐까 싶다. 그런 엄혹한 시절을 그려 내려면 보통 이상으로 다져진 내공과 긴 호흡이 필요하니 말이다.
이기호 작가는 누아르 뺨치는 반전드라마로 독재자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수사관에서 일약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누아르 주인공 전두환 장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시절, 안전택시 운전기사 1년차 신입 나복만에게 벌어진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작가는 짧게 끊고 지나갔지만, 그 시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부미방(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필두로 해서, 미국 부통령 방한을 앞둔 시기에 공권력을 집행하는 순경의 총기 난사 사건 그리고 대한민국을 통째로 흔든 큰손 장영자 씨 사건 등 그야말로 자고 나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사고공화국의 추억이 아련히 지나간다. 그리고 그 사건사고들의 뒤켠에는 누아르 주인공의 그림자가 얼비치고 있었다는 점도.
미국을 큰형으로 모시던 웃기는 짬뽕 같은 누아르 집권자는 부미방 사건의 주도자들을 잡기 위해 그야말로 전국을 이잡듯 뒤진다. 수배 중인 용의자들이 대거 원주에서 검거되기에 이르는데, 바로 이곳 원주가 우리의 주인공 나복만 씨가 둥지를 틀고 있던 곳이었다. 작가가 끝없이 권하는 대로 맥주를 들이켜거나 혹은 감자 칩을 무시로 집어 먹으며(실제로 독자는 작가의 권유대로 따라했음을 고백한다) 이기호 작가가 현란하게 구사하는 구라의 세계 속에 빠져 들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주인공 나복만의 아버지가 월북인사이며, 홀로 남은 어머니는 나복만을 두고 개가하여 나복만은 고아로 자라났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글을 모르는 문맹(文盲)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훗날 그날 안기부원들에게 고초를 겪을 적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글을 모르니 진술서를 작성할 수가 없었다.
깝깝한 마음에 시간이 있다면, 담배 한 대 피우고 나서 다시 이어가자. 아니지, 앞으로 배보다 배꼽이 커지게 될 정도로 담뱃세가 오른다니 누구 좋으라고 담밸 피우나.
훗날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는 중이지만, 장군이 통치하던 누아르 시절에 숱하게 언론 지상에 도배되었던 수많은 간첩 공안사건들이 알고 보니 모두가 정권 보위 차원에서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이기호 작가가 전면에 내세운 나복만 씨는 어쩌면 그 시절에 국가권력에게 그렇게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무고한 이들의 오마쥬가 아닐까. 도대체 운전면허도 딸 수 없는 실력의 까막눈 나복만 씨가 무슨 실력으로 이북에서 파견된 아버지와 만나 접선을 하고, 아버지가 건네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숙지하고, 원주 부근의 미국 주둔지에 대한 정보를 작성해서 북한에 보내 선전선동을 일삼았단 말인가. 그들의 상상력은 어지간한 글쟁이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나 보다.
고아원 시절 형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며 맷집 하나는 자신 있던 나복만 씨였지만, 장장 이십여 년 간 갈고 닦은 기관원들의 무수히 쏟아지는 각목 세례와 발길질 매뉴얼에는 어림도 없었다. 민주주의자 고(故) 김근태 의원이 남영동에서 스포츠머리나 손등에 털이 많이 난 요원 혹은 정 과장 같은 기관원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당할 때 정말 두려웠던 건, 고문 막간에 자식들의 성적이나 집안의 대소사 같은 일들을 걱정하는 일상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괴물 같은 폭력을 행사하던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일상을 지내는 보통 사람이었다는 점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 하긴 최근에 읽은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서 보면 독일 함부르크에서 모집된 지극히 평범한 독일 중년 사내들이 동부전선에서 냉혹한 유대인 학살자가 되지 않았던가.
이기호 작가의 현대사를 대하는 빼어난 역량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하는데 있지 않고, 너무 심각해질 수 있는 소재를 희화화해가면서 서사에 힘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처럼 나복만 씨의 비참한 삶을 그대로 그렸다면, 독자의 가독성은 현저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어마무시한 간첩단 조작사건에 교사가 연루된 불륜치정사건을 곁들이고,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반미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복만 씨의 동료 운전기사 박병철의 협박사건까지 고명으로 얹으니 장군의 누아르 반전드라마 뺨치는 그런 서사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반에 난데없이 월북해서 소련에서 희곡 작가로 활동 중인 나복만 씨의 생부가 등장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개연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 정도야 옥의 티 정도로 봐주면 안 될까.
그래서인지 후반으로 갈수록 왠지 힘이 달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 초반에 나복만 씨에게 30년도 넘는 수배의 족쇄를 채웠으니 해피엔딩을 기대하기는 난망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그가 악몽 같은 3호실에서 어떻게 탈출해서 옛 애인 김순희에게 연락을 해왔는지 궁금했지만 서사의 전개 과정을 유추해 봤을 때, 그것도 또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두렵고 분통이 터졌던 건, 우리가 부지런히 먹고 마시고 피우며 알게 모르게 낸 세금이 스포츠머리나 손등에 털이 많이 난 요원 혹은 정 과장의 활동자금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다시 한 번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어떻게 주인을 배신하는 아브락사스가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됐다. 이렇게 부조리한 현실의 기원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 이기호 작가의 꾸준한 집필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