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시인의 <구관조 씻기기>를 애정하는 나는 <희지의 세계>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독자를 기다리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작가였기에 조용히 기다렸고, 인터넷으로 주문해 일찍 받아서 읽어볼 수 있었다.
그의 시에는 드라마가 있다. 마치 단막극을 보며 과일을 깎아 먹는 어머니의 뒷모습처럼 익숙하고 편안함이 있다. 시인이 어떠한 인터뷰에서 “쉽게 읽히는” 것은 앞서가지 못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너무 편안해서 게속 의심하고, 너무 아름다워서 불편해지는 시를 “앞서가지 못 한” 것이라 인정할 순 없는 것이다.
젊은 시인들이 계속해서 등단을 하고 책을 낸다.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까지의 시인은 생각보다 많고 조로한 이들 또한 넘쳐난다. 나는 시를 다 정독한 후에 책날개를 펼쳐 작가의 출생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사실 <구관조 씻기기>를 늦게 알았고 황시인의 나이도 늦게 알았기에 나는 시를 다 읽고 그의 나이를 지레짐작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보다 조금 오빠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시인의 나이를 맞추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자주 배신당하기 때문에 짜릿하고 맞추었을 때 또한 쾌감을 느낀다. 오랜만에 맞춘 시인의 나이는 나에겐 즐거움이었다.
즐거움을 선사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나에게 또 다른 쾌감을 선사했다. 작가의 방에 몰래 들어가 일기인지 노트인지 모를 끄적인 것들을 잔뜩 읽고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희지의 세계>에 나오는 종로에 대한 시들 또한 그가 종로를 걷고 혹시 청계천에 앉아서 쓴 낙서들을 모아 만든 기록들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의 편안함이 있었다. 편안함 뒤에는 황인찬 시인의 대범함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다름아닌 ‘키치함’이었다. 어설프게 했더라면 정말 일기이거나 낙서였을지도 모를 텍스트는 아주 잘 도정되어 ‘시’가 되어 세상에 나왔다.
이십대 후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이십대에 시집을 두 권이나 낼 수 있는 생산력과 조로하기 쉬운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써내려간 ‘키치한’ 택스트. 어려운 일을 깔끔하게 해내는 황인찬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벌써 기대가 된다.
새가 두려워 새를 시로 쓴다는 그의 이번 시집에는 ‘새’라는 단어가 서른 세 번이나 등장한다. 서른 세 번 이상 두려움의 단어를 적어내려간 그에게 한 명의 독자로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