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준을 나누는 좋은 재료가 된다.
마치 틀 이론처럼 두 가지 기준을 두고 순수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한강의 <희랍어 시간>
어느날 라틴어나 희랍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서 일본어로 대화하는 여자들을 본 직후에 든 생각이었다.
한 명은 일어일문학과에서 배운 일본어였고,
다른 한 명은 일본이 좋아 6개월의 여행에서 배운 일론어였다.
서로 일본어로 대화를 하다가 대학에서 배운 여자가 말했다.
“나는 일본어가 질렸어요.”
그러자 앞의 여자가 대답했다.
“나는 점점 빠졌어요. 이번에 여행을 또 가려해요.”
그녀들만 보더라도 기준은 명확했다.
일어에 대한 학구적인 호기심과 일본에 대한 애정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더 넓은 듯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두 여자를 하나의 경우 “목적”이 있는 베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적”있는 배움이란 생각을 한 후 책장에서 오랜만에
<수레바퀴 아래서>를 꺼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한스가 입학시험 이후로 더욱 더 “목적”에
시달리는 행위에 빠지게 되는 6주간의 여름방학에 대한 내용이다.
한스는 자연을 좋아하고 낚시를 사랑했지만 슈트트가르트에 대녀온 이후로는
학문에 대한 강한 갈증을 느끼고, 그것을 해갈하기 위해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한다.
어려웠던 책이 술술 읽히고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을 느낀다.
물론 그것은 인간이 하나의 성장을 하는 아름다운 과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순수를 떠나는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소개한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 나오는 여자는 희랍어를 목적없이 배우는 순수의 길을 걷는다.
그렇다면 내가 순수한 제2외국어 습득을 떠올리며 읽어야했던 책은 <희랍어 시간이>어야지
왜 <수레바쿠 아래서>였을까.
좋은 예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름다워서 <데미안>을 읽고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지나온 나와 현재의 나를 대면하기 위해 읽는다.
순수에 대한 고뇌가 <수레바퀴 아래서>를 자꾸만 펼치게 만든다.
이 책은, 대면하게 만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