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처음이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 중 한 권인 <남아 있는 나날>을 이야기하면 다르다. 이 소설은 직접 읽지 않고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보았다. 정확히는 비디오다. 한참 영화에 빠져 있을 당시 집에 쌓여 있던 비디오 중 하나를 꺼내어 보았다. 화려한 재미는 주지 않지만 은근한 재미로 나를 유혹했던 감독이라 최소한 실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끝까지 본 후 느낌은 요즘말로 대박이었다. 정적인 화면 속에 은근히 드러나는 감정의 깊이와 절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감동을 준 것이다. 아마 그해에 본 수많은 영화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참고로 그때 본 영화가 최소 하루에 한 편 이상이었다.
영화로 먼저 만났는데 사실 원작이 있는 것을 몰랐다. 아마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여도 영화의 감동 때문에 읽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원작을 읽을 기회가 있었지만 포기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녹턴>을 읽은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고, 영화에서 받은 감동이 문장으로 어떻게 펼쳐지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뭐 이것은 나중에 이루어질 일이니 그냥 넘어가자. 이렇게 길게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번 소설이 준 느낌이 좋았고, 읽으면서 옛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란 부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제목대로 다섯 단편이 실려 있다. 모두 음악과 관련이 있다. 각각 독립된 이야기라 따로 읽어도 상관없다. 물론 두세 편은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앞 이야기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것 또한 독립된 이야기라 그냥 읽어도 상관없다.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부제의 의미고, 다음으로는 약간 의외로 풀리는 결말이다. 크게 긴장감을 불러오는 상황이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약간은 밋밋한 전개와 상황들이 가슴 한 곳에 등장인물들의 삶을 점점 쌓아올리고 울리게 만든다. 그것도 각각 다른 느낌과 분위기로 말이다.
<크루너>는 ‘낮게 노래하다, 작은 소리로 속삭이다’라는 뜻인 croon에서 비롯된 말로서, 그렇게 부르는 가수를 말한다. 이 단편 속에선 유명 가수 토니 가드너를 말한다. 화자는 폴란드 출신의 기타리스트다. 그가 토니 가드너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머니가 좋아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카페에서 연주하던 그에게 토니의 존재는 추억의 대상이기도 하다. 엄마를 생각해 말을 건다. 이때부터 이 둘의 대화가 오고가고 토니가 연출하고자 하는 이벤트에 동참하게 된다. 이 뒤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예상을 넘어선 것으로 사랑과 삶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비가 오나 해가 뜨나>는 연극으로 만들면 좋을 것 같다. 상황이 조그마한 소품 상황극으로 만들어진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권태기에 빠진 부부 사이에 끼워든 옛 친구 레이의 좌충우돌하는 모습과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읽을 당시는 쉽게 이야기에 빠지지 못했는데 지금 이 순간 무대 장치와 배우들의 움직임과 효과음 등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자신의 실수를 숨기기 위한 레이의 노력은 잘 표현하면 큰 웃음을 줄 것 같다. 단편 영화로 만들어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중 한 편이 <말번힐스>이다. 음악가로 성공하고 싶지만 누구도 그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한 음악가 이야기다. 자신이 직접 작곡했다는 이유만으로 의문을 드러내고, 기회마저 차단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누나의 카페에서 일을 도와주는 것이다. 어쩌면 단순한 일상인데 이런 그에게 한 부부가 나타난다. 오해를 하고, 살짝 그들을 놀린다. 하지만 그가 연주를 하는 것을 들은 두 부부의 찬사와 그들의 삶을 듣게 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그렇다고 삶에 큰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일상의 지속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이 단편집에서 영화로 만들어서 흥행에 성공할 작품으로 꼽는다면 당연히 <녹턴>이다. 실력은 있지만 외모가 부족한 테너 색스폰 연주가 스티브와 토니 가드너의 아내이자 유명 가수인 린디 가드너의 만남과 활극이 가벼운 흥분과 긴장감을 준다. 전혀 만날 일이 없는 두 사람이 만나 곳이 성형수술을 위한 호텔이란 것과 옆방이란 점부터 그렇다. 음악, 질투, 부러움, 사랑 등에 대한 그들의 반응과 행동은 린디가 재즈 트로피를 가져오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확 바뀐다. 약간 무겁게 만들 수도 있지만 트로피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좀더 규모를 키우고 흥미롭게 만든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다. 물론 할리우드에서 만든다면 마지막 그들의 성공도 다루어야할 것이다.
<첼리스트>는 반전이 숨겨져 있다. 그 반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란 것과 후일담이 또 다른 해석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긴 여운을 남긴다. 첼리스트 티보르가 엘로이즈 매코믹을 만나고, 그녀에게 새로운 음악 해석을 듣고 연주하는 것까지는 분명한 결말을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가 드러나고, 음악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하면서 바뀐다. 제대로 된 연주가 무엇인지, 자신의 연주에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잠재력이란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