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보라처럼 예측할 수 없이 튀어 오르는
슬픔과 고통, 그리움의 파편들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첫 시집 『립싱크 하이웨이』를 통해 기이한 꿈속과도 같은 세계를 구축해 내며 존재감을 드러낸 박지일 시인의 신작 시집 『물보라』가 민음의 시 326번으로 출간되었다. 박지일 시인은 2021년, 2024년 문지문학상 ‘시’ 부문 후보에 선정되는 등 꾸준히 평단과 독자의 신뢰를 받아 왔다.
신작 시집 『물보라』는 우리의 현재를 불시에 습격하고 압도하는 과거의 슬픔과 고통 들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세밀하게 기록하는 시인만의 관찰 일지다. 「물보라」라는 동명의 시 스물한 편으로 시작되는 이번 시집은 기억의 물방울 안에 어떤 인물과 사건이 깃들어 있는지, 그리고 이 모든 시들이 어떤 시간 속에서 쓰였는지에 대한 시편들로 이어지며 끝내 시 너머 삶 쪽으로 흘러넘친다. 삶에서 시 쪽으로, 시에서 삶 쪽으로 부딪치다 흩어지는 물보라에 대한 이 기록은 물 밀 듯 밀려드는 기억의 홍수에 잠겨 있는 독자들에게 든든한 부표가 되어 줄 것이다.
■ 물보라의 불안과 초조
펜은 바람 위에다가 너를 써 갈기며 달아난다.
질주하라. 질주해!
그곳에 너는 없고,
물보라, 물보라.
걸음을 옮기려 들 때마다 고꾸라지길 반복하는 멧닭만이 있다.
―「물보라」에서
시집 『물보라』를 펼치면 스물한 편의 「물보라」가 시작되고 또 이어진다. 물보라가 ‘물결이 바위 따위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스물한 편의 「물보라」는 튀는 모양새가 불규칙적이라는 점에서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모두 같은 물방울이기에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물보라」는 하나같이 망설인다. “열거나, 열지 않거나, 선택을 어찌해야 하긴 하는데…” “네게 너는 주도권이 없는 것” 같기에, 어렵게 마음먹은 다짐은 다음 문장에서 곧바로 전복되고, 정과 반을 어지러이 헤매던 화자는 결국 고꾸라지고 만다. 채찍질하는 목소리(“질주하라. 질주해!”)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그는 어느 방향으로든 일단 달려 보기를 결심하지만 이내 넘어지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불안하고 초조하여 끝없이 움직이되 곧장 넘어지는 물보라. 우리의 삶을 머나먼 곳에서 비춰 본다면, 그 양상은 어쩌면 물보라의 그것과 닮아 있을지 모른다.
■ 불시에 튀어 오르는 기억
너는 할 일을 마쳤고, 네가 썼던 글이 너를 기억하려 든다; 밀려가는 파도 있을 것이니, 밀려오는 파도 있을 것이라고. 당연한 것만 말하고 싶고, 당연한 것이라도 말하고 싶다고.
제발.
다 옛날 일이다.
다 옛날 일인데.
―「「물보라」」에서
물보라의 불규칙성, 무작위성은 기억의 속성과 닮았다. 불시에 떠오른 기억이 하루를 덮쳐 올 때마다 우리는 그것에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마는데, 이 사로잡힘은 일생 내내 지속되는 하나의 숙명과도 같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은 뿌연 안개처럼 흐려지기도 하지만, 머릿속에서 거듭 재구성되며 자신의 존재를 새로이 드러낸다. 그리고 물보라처럼 무작위로 우리를 급습하는 기억은 대개 슬프고, 고통스럽고, 하염없이 애틋하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 꿈이 많았던 사람들, 나의 거울과도 같았던 사람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들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럴 때면 내가 기억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썼던 글이 너를 기억하려” 드는 것만 같다. 화자는 자신의 기억이 정확한지 계속해서 의심하고 다시 쓰면서 튀어 오른 물보라를 오래도록 바라보려 한다.
■ 늘려 놓은 시간 안에서 오래도록 바라보기
너는 거울을 납치하여 등에 업고 날아오른다. 너는 물구나무 한다. 네 긴 머리카락이 손잡이처럼 흔들린다. 세상이 뒤집히고 열차는 순환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11月 9.7日」에서
불확실한 기억을 보다 정확하게 세공하는 일에는 물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억은 희미하고, 그것이 우리를 찾아오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기에 시인은 시간을 무한히 늘려 기억을 보다 자세히 관찰하고자 한다. 11월 서른 개의 하루 사이사이 박지일은 ‘9.7일’과 같은 중간 날짜를 끼워 넣는다. 그러자 11월은 60일이 된다. 60일이 된 11월은 어쩌면 90일, 120일로 무한히 늘어날 수도 있다. 시간을 무한히 늘리는 행위를 통해 박지일은 물보라의 방울마다 스며 있는 기억과, 기억이 품은 슬픔과 그리움을 관찰기를 쓰듯 자세히 기록한다. 이것은 시인이 과거의 기억을 잘 다스리고 소화하여 현재를 기꺼이 살아 내려는 분투의 한 방식이다. ““생각”보다 살아 냄이 실행되어야 한다. 그 고투의 기록이 이 시집이다.”라는 채호기 시인의 말처럼 시집 『물보라』는 현재에 겨우 존재하는 한 사람의 생존 일지와도 같다. 박지일이 기록해 낸, 물방울만큼 작고 자세한 슬픔들은 우리가 각자의 슬픔을 다루는 데 있어 좋은 참고서가 되어 줄 것이다.
■ 본문에서
너는 눈을 뜨고 잔다, 무엇을 잊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무엇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기억하면 무엇은 지워질 수밖에 없고, 무엇을 지우면 무엇이 기억날 수밖에 없다. 억새판 복판에서 너는 잠든다. 흔들리는 억새가 네 눈에 아른거리나, 꿈도 생시도 네겐 없어.
―「물보라」에서
물은 너를 휘두르며 자기를 위로한다. 너는 물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진 만큼 가까워진다.
너는 너를 잃어버리고, 너를 되찾기도 하지만, 그래야 할 목적을 이내 잃어버린다.
물은 떨림이고, 떨림은 물을 한다. 발작하고, 웃고, 달뜬 채로 너를 떠들면서 물은 쓴다. 나는 네게서 동시에 본다고; 두 개 이상의 죽음과 한 개의 삶을.
물보라.
―「물보라」에서
너는 쓴다.
물보라와 물보라 사이에서.
책을 벗어나지 못한 글자는 책을 빨아들여 혀를 만들었다.
까닭에 사랑과 평화 같은 단어 또한 뇌 표면의 막을 찢으며 부화한다.
계사년, 흐드러진 벚나무 아래에서 중얼거리다; 물보라. 다 물보라였다고.
골통이 바수어진다.
―「「물보라」」에서
물보라 13
물보라 15
물보라 17
물보라 18
물보라 19
물보라 20
물보라 22
물보라 23
물보라 24
물보라 25
물보라 26
물보라 27
물보라 28
물보라 30
물보라 31
물보라 33
물보라 34
물보라 37
물보라 38
물보라 40
물보라 42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물보라」 45
위리안치 75
「물보라」 우수리 편 81
매일 자정 이코마 산에서 「투실솔: 만날 수 없는 만남; 물보라와-물보라와-물보라와-」를 매질하는 모리나가 유우코 씨 94
「물보라」와 상관없는 Thomas De Quincey 102
「물보라」를 위한 사전설문조사: 12월 17일 14:17~14:52 경복궁역 3-1번 출구 110
투실솔: 만날 수 없는 만남; 물보라와-물보라와-물보라와- 112
『물보라』를 위한 부록, 일지, 참고 노트, 혹은 함께 이어 볼 이야기
11月 1日 117
11月 1.3日 118
11月 2日 119
11月 2.4日 120
11月 3日 121
11月 3.1日 122
11月 4日 123
11月 4.3日 124
11月 5日 125
11月 5.9日 126
11月 6日 127
11月 6.4日 128
11月 7日 129
11月 7.2日 130
11月 8日 131
11月 8.9日 132
11月 9日 133
11月 9.7日 134
11月 10日 135
11月 10.8日 136
11月 11日 137
11月 11.3日 138
11月 12日 139
11月 12.6日 140
11月 13日 141
11月 13.8日 142
11月 14日 143
11月 14.6日 144
11月 15日 145
11月 15.3日 146
11月 16日 147
11月 16.4日 148
11月 17日 149
11月 17.8日 150
11月 18日 151
11月 18.7日 152
11月 19日 153
11月 19.4日 154
11月 20日 155
11月 20.1日 156
11月 21日 157
11月 21.7日 158
11月 22日 159
11月 22.9日 160
11月 23日 161
11月 23.4日 162
11月 24日 163
11月 24.5日 164
11月 25日 165
11月 25.8日 166
11月 26日 167
11月 26.2日 168
11月 27日 169
11月 27.4日 170
11月 28日 171
11月 28.9日 172
11月 29日 173
11月 29.3日 174
11月 30日 175
11月 30.1日 176
발문-신종원(소설가) 177
추천의 글-채호기(시인) 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