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모의 눈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은 옅은 갈색이다. 저 눈동자가 녹색빛을 띨 수도 있다니. 그 때도 지금처럼 딴 생각을 해버렸던 것 같다. 같은 초록색이어서 그런가? 갑자기 포도가 먹고 싶어졌다. 단 청포도를 껍찔째 입안에 톡 터뜨려 씹고 싶어졌다.” (86)
하얀 설원에 반짝반짝 빛나는 초록색 ’포도‘ 이미지가 계속 떠올랐다. 모루에게 소중한 이모 유진과 이월을 이어주는 낭만적인 모티프였던 것 같다. 눈동자가 초록색 포도처럼 변할 이모, 그리고 모두가 같은 향을 풍기는 황폐한 센터에서 혼자만 포도향을 풍기는 이월. 모루와 이월은 유진을 찾을 수 있을까? 트럭을 타고 설원을 달리는 두 여자의 모습으로 끝나니 여운이 길게 남는다. 이런 엔딩은 어쩔 수 없이 <델마와 루이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환경 오염, 기후 재난이 일상이 된 요즘, 실리카겔 알갱이 같은 유독한 눈송이가 세상을 덮은 이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이라는 게 참 재밌었다. 이 세계에 조난 당한 이방인 같은 서로를 알아본 모루와 이월의 인연도 참 소중하게 보였다. 성애적인 끌림이라 단정지을 수 없겠지만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로 보인다. 그 사랑은 하얀 설원 속 초록색 포도처럼 빛나는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