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의 디스토피아

P.32

자본이나 기술, 전문 지식이 없으면 국민으로 받아주지 않는 나라. 반도체와 모바일, 디스플레이 분야에 가장 많은 코어 테크놀로지를 보유한 나라. 백신과 의약품, 의료기기와 관련된 가장 많은 특허를 보유한 나라. 세계 최대 규모의 생명공학 연구소와 최고 수준의 연구진을 보유한 나라. 일곱 명의 공동 총리 제도를 채택한 유일한 나라. 국회는 꼭두각시일 뿐, 실제로는 총리들에게 전권이 있는데도 그 일곱 사람이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채 대외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나라. 어떠한 국제기구나 지역 연합에도 가입하지 않은 나라. ‘타운’이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이상한 도시국가. 밖에 있는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고 안에 있는 누구도 나가려 하지 않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국가에서 사하맨션은 유일한 통로 혹은 비상구 같은 곳이다.

 

타운주민인 L1, 이등시민으로 꼭 필요하지만 아무도 하고싶어하지 않는 더럽고 위험한 일들을 하며 영주권을 2년마다 갱신하는 L2, 그리고 그마저도 취득하지 못해 모든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재된 불가촉천민 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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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지만 따지지 못하고 그저 순응하며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는 사하들을 읽으며, 패배주의에 빠져 헬조선, 탈조선을 부르짖던 한국사회를 보고 저소득국가의 사람들을 본다.

 

P.51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

진경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고, 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등을 돌려 누우며 덧붙였다.

“나도 타운 주민이 되고 싶어.”

타운 주민. 그리고 한 달 후, 도경은 수와 함께 714호로 독립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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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1

가족들을 생각해도 더 이상 애틋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동생들에 대한 부담감, 죄책감만 깊어졌다. 크게 뛰어난 것도 없고 죽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고도 할 수 없지만 대체로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럼 적어도 이렇게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리지는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연화는 이 모든 상황에 넌더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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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7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거나 누가 나를 해칠 것 같다는 뜻이 아니야. 그냥 나는 여기서 살 수 없는 사람이야. 아가미가 없는데 물속에서 살 수는 없잖아. 그 물이 설사 깨끗하고 따뜻하고 안전하다고 해도 그런 거잖아. 아예 못 사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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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3

“저는 자식을 팔아먹지 않았어요. 이아를, 우리 이아를 팔아먹지 않았어요.”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던 말일 것이다.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아 엄마는 코를 한 번 크게 훌쩍이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위로는 받았어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받았어요. 위로와 배려를 받고 나니 그걸 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따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팔아먹은 게 됐어요.그러니까 진경 씨, 살면서 혹시 위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받지 말아요. 위로도 배려도 보살핌도 격려도 함부로 받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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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3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