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 나는 과일의 가치를 깎지 않으려 차라리 태워 버리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는 게 ‘실패’ 내지는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가족은 덜덜거리는 고물차와 함께 로드트립을 하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를 돕기도 하고, 억압하는 경찰에 맞서 보고, 잠재력을 지닌 천막촌에 살아보기도 하는 그 과정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루지 못했을 성장을 이루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대사처럼, 어머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존재에서 말을 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존재로 성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톰은 자기를 공격한 사람을 죽여서 감옥에 갔다. 죄는 죄라고도 볼 수 있고, 정당방위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이 보여 주는 톰의 면모는 내면의 불꽃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지 확 타오를 수 있는 내면의 강렬함. 그도 로드트립의 과정을 거치고 케이시의 영향을 받아 짐작건대 잠재적인 사상가, 투쟁 지도자로 성장한다. 로저샨도 잔인한 저주의 말을 듣고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남편이 사라져서 종종거리던 모습을 보이다가 오히려 저주와 불안이 정확하게 이루어졌음에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서 성장의 아름다운 면모를 엿보았다. 나도 결과가 실패일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사실에 사로잡혀 시작조차 주저하기보다는 과정에서 얻어갈 성장을 먼저 생각하는 용기를 주었다.

가족의 성장 뿐만 아니라 읽는 내내 사회 구조에 대해 생각할 부분이 많다. ‘대기업들은 굶주림과 분노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어쩌면 품삯으로 지불할 수도 있었을 돈을 독가스와 총을 사들이는 데, 공작원과 첩자를 고용하는 데,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사람들을 훈련하는 데 썼다.’

이 책에서는 대기업이 품삯을 깎아 모은 돈으로 통조림 회사를 매수하여 과일 값을 깎음으로써 작은 농장까지 말려 죽인다. 작은 농장의 주인들이 아무리 동정심을 갖고 노동자들에게 높은 급료를 주고 싶어도 농장조합의 지침이 그러지 못하게 한다.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고, 일자리는 적기 때문에 같은 노동자들끼리 자기 가치를 더 깎아 가며 싸운다. 그리고 멀리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회사 차원에서 식료품을 더 비싸게 팔도록 함으로써 고용된 사람일 뿐인 가게 직원과 이주민들의 갈등을 야기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를 어떻게든 돕는 사람들이 멋지기도 하면서, 지금은 이런 일이 없나? 생각하게 했다. 물론 지금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급료를 깎을 수는 없고, 직접적인 폭력과 담합으로 억압하지는 않지만. 훨씬 더 간접적이고 우아한 방식으로 착취가 일어나는 건 아닐까?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이러한 사회 구조는 바뀔 수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식으로.

하지만 ‘변화가 다가오고 있어. 어떤 변화인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변화를 보지 못할지도 모르지.’라는 대사처럼. 우리가 지금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옳기만 하다면 변화는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이게 이 작가가 가진 인류애가 아닐까 싶어. 인간이 움직이고자 하는 본성을 믿는 것. ‘사람이 갖고 있는 최후의 분명한 기능, 일하고 싶어 안달하는 몸과 단 한 사람의 욕구 충족 이상의 목적을 위해 창조하고 싶어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벽을 쌓고, 집을 짓고, 댐을 만들고, 그 벽과 집과 댐 속에 인간 자신의 일부를 넣는’ 일로써 육체와 영혼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

인디언을 죽인 사람들을 또 트랙터와 자본이 죽인다. 사실은 읽으면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에 대한 서술이나 아메리카 대륙 토착민들을 몰아낸 서술 때문에 신경이 거슬리는 면이 없지 않았는데, 읽고 있으면 투쟁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다른 소수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소설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퉁치는 이해가 아니라, 이 소설이 들려주는 팔 벌려 침략자를 막는 인디언 이야기나 남성과 여성이 체감하는 삶의 흐름에 관한 묘사라든지 하는 부분에서. 그래서 나도 원인과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덜컹거리는 고물차를 타고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분량이 긴 책을 읽는 데 주저함이 많았는데, 책에 담긴 풍부한 이야기와 사유를 느끼고 나니 다른 책에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