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치새가 사는 숲
시리즈 오늘의 젊은 작가 43 | 분야 오늘의 젊은 작가 43, 한국 문학
“나는 불행한 기억을 사랑했다. 불행에 집착했다.
마음속 보석함에 불행한 기억을 모았다.
내 사랑은 악취미였다.”
끔찍한 진실 위에 덧붙인 예쁜 거짓
불운과 불행이 반짝반짝 빛나는
내 기억의 숲, 내 비밀의 숲
장진영 장편소설 『치치새가 사는 숲』이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201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장진영은 첫 소설집 『마음만 먹으면』, 장편소설 『취미는 사생활』을 통해 서스펜스적 구성과 리드미컬하고 밀도 높은 문장, 평범해 보이지만 한순간 폭발적인 힘과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로 한국문학의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을 알렸다. 특히 모순적인 감정과 생각까지도 솔직하고 거침없이 발화하며 예측 불가능한 전개로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들은 장진영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개성이자 강점이다.
『치치새가 사는 숲』은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가 내는 두 개의 목소리가 겹치고 맞물리며 펼쳐지는 소설이다. 20년 전 ‘치치림’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은 열네 살의 ‘나’와 그때를 돌아보는 현재 ‘나’의 목소리다. 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2003년, 평준화 정책하에 배정받은 최악의 중학교와 그보다 더 최악인 집을 오가며 인정받기 위해 악착같이 애쓰던 화자 앞에 한 남자가 운명처럼 나타난다. 그와의 관계를 ‘사랑’이라 주장하는 과거의 ‘나’와 이를 말없이 지켜보며 심한 가려움증에 고통받는 현재의 ‘나’가 대비되며 분열된다.
『치치새가 사는 숲』은 스스로를 구원하려 자기 파괴적인 허구의 세계로 치닫는 치치림을 통해 상상 가능한 가장 위험한 윤리적 극단의 지점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정해 둔 ‘학생다움’, ‘피해자다움’ 등 모든 기준과 경계를 넘어 그 근원을 마주하도록 이끈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진실로부터 멀어진 ‘비밀의 숲’으로 만들게 하는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 아이들의 생존 방식
‘치치림’의 열네 살 봄은 풋풋하고 아름다운 추억 대신 냉혹한 현실의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IMF로 인해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부모는 학대에 가까운 무관심으로 아이들을 방치하고, ‘나’는 언니가 그랬듯 공부를 잘해도 어차피 대학에 갈 수 없으므로 미래를 그리는 대신 지금 당장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얼굴과 몸매, 성적 매력에 집착한다. 학교는 이미 교사와 학생 할 것 없이 만연한 차별과 폭력에 물들어 있다. 돌아가며 왕따를 시키거나 당하는 일이 당연했던 초등학교 때처럼 중학교에서도 ‘나’는 기꺼이 가해자가 된다. 친구 ‘달미’와 비교해 예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노력’해서 친구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뢰밭 같은 폭력의 세계를 홀로 헤쳐 나가는 화자 앞에 어느 날 ‘차장님’이 나타난다. 비싼 차를 타면서 모두에게 선망받는 자리에 있지만 다정하고 똑똑하고 과시하지 않는 그는 그동안 화자가 만난 그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 유일한 ‘어른’이었다.
■ 잘못된 질문만 던지는 어른들
‘나’는 수많은 어른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그에 답한다. 미성년자로서 합당한 행동이었는지, 얼마나 보호받을 만한 아이인지 따져 묻는 질문에 ‘나’는 모두 어긋난 대답만 내놓는다. ‘차장님’과의 만남에 대해 줄곧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하며, 그의 차를 왜 탔는지 그가 자신의 생일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답하지 못한다. 게다가 ‘차장님’과의 기억에서 원인과 결과는 수시로 뒤바뀐다. 수신자의 이름을 비워 두고 꾸미던 러브장은 ‘차장님’을 만나자 그의 이름으로 채워지고, 이미 그의 집 냉장고 속에 들어 있었던 소고기는 ‘나’를 먹이려고 꺼내 왔다는 점에서 ‘나’를 위해 준비된 음식이 된다. ‘인과 없음’은 곧 진실된 운명적 사랑의 증거가 된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어른들이 안도한 얼굴로 돌아설 때, ‘학생다움’, ‘피해자다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나’는 들어줄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남은 순간 진실을 마주한다. 소설의 이 마지막 순간, 마침내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가해자가 누구였는지.
■ 동시에 존재하는 과거와 현재
『치치새가 사는 숲』을 이끌어 가는 과거와 현재의 목소리는 등장과 퇴장도 없이 언제나 함께 있다. 친구와 가족을 향한 불안과 질투, 원망과 자책을 오가며 자기 욕망을 거침없이 뱉는 열네 살의 ‘나’와 20년의 시간 동안 훌쩍 변해 버린 가족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농담으로 마음을 숨기는 현재의 ‘나’. 전혀 다른 톤의 두 목소리는 장진영 특유의 유려하게 흐르는 문장, 모순조차 가감 없이 드러내는 솔직한 화법, 날카로운 통찰에서 나온 매력적인 에너지에 의해 이음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장진영이 내어 준 마법 같은 이야기의 길 위에서 “20년 전과 현재가 페이스트리처럼 겹쳐서 동시에 흐른다.”는 화자의 말은 현실이 되어 펼쳐진다. 과거는 끝내 조금도 멀어지지 않고 현재의 ‘곁에 있다’. 모두가 미래로 훌쩍 떠나 버리고 홀로 남아 기억을 새로 쓰는 과거에게 현재가 ‘곁에 있다’. 비밀로 결속한 친구이자 ‘거짓의 숲’을 함께 지은 유일한 공모자로서.
■ 추천의 글
지뢰밭 같은 폭력의 세계에서 소녀는 자기만의 대본을 쓴다. 어차피 인과가 성립되지 않는 무질서한 세계라면 차라리 자신을 주인공 삼아 ‘나쁜 대본’을 작성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어차피 누구도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지도 소녀의 말을 경청하지도 않는 세계라면 성적 착취를 위한 기만과 유인의 몸짓이라도 ‘사랑’으로 치장하는 편이 달콤할 테니까. – 이소 (문학평론가)
이 소설은 어린 시절의 악몽을 다시 불러들인다. 기억하고, 이야기한다. 치치림은 집요하게 자신의 과거를 뒤쫓고, 능란하게 사실관계를 뒤집는다. 이 숲을 헤매는 동안, 나는 어찌할 바 모르는 기분에 여러 번 휩싸였다. 나 역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시절이 있었고, 여전히 그때의 마음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니까. 그리하여 나는 치치림의 목소리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렸고, 책장을 덮은 순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굉장하네.” – 강화길 (소설가)
■ 본문에서
그해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중학교로 배정되었다. 흔히 ‘뺑뺑이’라고 불리는 무시험 추첨제에 의해서였다. 고급스럽게 표현하자면 ‘평준화’에 의해서였다. 평준화이긴 했지만 배치 고사는 봤다. 반마다 수준이 들쑥날쑥하지 않도록 평준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평균에 미친 시절이었다. 나누고 줄 세우고 비교하는 걸 죄악시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죄악시한다는 건, 역으로, 열망한다는 뜻이기도 했다.(8쪽)
20년이 흐른 지금 이런 걸 물으면 언니는 헛소리 집어치워, 라고 할 것이다. 그게 뭐가 중요해.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살아. 사리 분별 좀 해. 조리 있게 좀 말해. 도대체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속 터지게 좀 하지 마. 그러면 나는 조금도 상처 받지 않고 굉장하네, 하고 받아칠 것이다. 나한테 왜 그랬어? 하고 묻는 대신에 언니를 웃길 것이다.(17쪽)
세상은 인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요. 그때 내가 피부과 의사의 말을 기억할 리는 없었다. 열네 살이었으니까. 나는 20년 후에 보라매병원 진료실에서 그 말을 듣게 된다. 그렇지만 이미 그 말을 들은 듯했다. 듣고 기억하는 듯했다. 미래를 기억하는 게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원인이 결과를 빚는 게 아니라 결과가 원인을 반추하게 하므로. 미래가 과거를 구성하므로. 결과가 원인에 앞서므로.(45쪽)
쿨워터, 차가운 물이라는 뜻이다. 쿨워터 냄새는 차가운 물에서 나는 냄새와 다르다. 그런데도 쿨워터, 라고 하면 누구나 같은 냄새를 떠올린다. 파란색 냄새. 남탕이나 헬스장 샤워실에서 나는 냄새. 나는 불행한 기억을 사랑했다. 불행에 집착했다. 마음속 보석함에 불행한 기억을 모았다. 내 사랑은 악취미였다. 그 체어맨 안에서 내가 몸을 긁었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해야 할 일들은 따로 있었다.(80쪽)
자꾸 늙은이처럼 말하게 되네. 20년 전에 불과한데.
요즘 나는 하루를 이틀씩 살고 있다. 시간이 병렬로 흐르기 때문이다. 20년 전과 현재가 페이스트리처럼 겹쳐서 동시에 흐른다. 참기 어려운 감각이다. 살갗을 긁는 걸 참기 어려운 것처럼. 어쩌면 피부의 독은 열이 아니라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91쪽)
치치새가 사는 숲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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