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삶을 선택한 남자
남편의 삶을 선택한 여자
“21세기 제인 오스틴”, “제2의 버지니아 울프”
영국 여성 문학의 계보를 잇는 레이철 커스크 최신작
▶현대판 『댈러웨이 부인』. 레이철 커스크 작품 중 최고. -《옵저버》
▶브래드쇼 가족을 해부하는 문체가 무자비할 정도로 예리하다.-《데일리 텔레그래프》
▶이번에도 커스크는 문학 본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가디언》
영국 젊은 페미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레이철 커스크의 장편소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이 모던 클래식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남자의 일상을 통해 현대 페미니즘의 주요 쟁점인 부부간 역할 갈등을 그리고 있다. 남자는 시간 강사로 일하던 아내가 학과장 제안을 받아 전일제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내고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집안일 하기, 아이 학교 보내기, 피아노 배우기 등을 통해 그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에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하지만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서로에 대한 불만을 견디지 못하고 일 년 만에 남자는 직장인으로, 여자는 주부로 돌아간다. 전통적인 가족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부부의 모습은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가족 내 성 역할 갈등의 양상, 즉 진보적인 가정 형태를 추구하면서도 전통적인 가정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의식의 이중성을 반영한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가정에서 남성이 경험하는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도 특기할 만한 소설이다. 여성 중심적 시각에서 쓰인 기존의 페미니즘 소설과 달리 남성 입장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구성은, 여성에 대한 편견뿐 아니라 남성에 대한 편견 역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성 역할 갈등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을 제공한다. 독자들은 여성성과 남성성, 모성과 가정을 향한 고정관념에 반기를 드는 소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을 통해, 21세기 제인 오스틴으로 평가받는 작가 레이철 커스크의 한층 성숙해진 작품세계를 만나 볼 수 있다.
■도전-전업주부가 된 남편, 학과장이 된 아내
토머스는 아내의 학과장 승진을 계기로 회사를 그만둔다. 아내 대신 딸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의 승진이라는 표면적인 이유 뒤에는 주부의 삶을 꿈꿨던 토머스 자신의 바람이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살림에 뛰어든 토머스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피아노 배우기. 이 역시 회사원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그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행복할 것만 같던 일상에 예기치 못한 고민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아내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가는 것이다. 집안일에 능수능란한 형수를 아내와 비교하는가 하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아내의 태도에서 거만함을 느끼는 토머스. 그런 토머스 앞에 새로운 여자가 나타난다. 그 여자는 여성스럽고 가정적이다.
토니는 살림을 맡아 주겠다는 남편 덕분에 원하던 일을 하게 된다. 아이 챙기고 남편 뒤치다꺼리만 하는 여자들의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는 토니. 그러나 그녀 역시 새로운 갈등에 부딪히기 시작한다. 남편이 골라 준 옷을 입은 딸을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질투심이 일고, 부엌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남편을 보면 괜히 신경질이 난다. 심지어는 남편이 집안일 하는 것 자체가 무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토니에게 학회에서 만난 젊은 교수가 접근해 온다. 토니도 지적이고 능력 있는 그가 싫지 않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꿈꾸던 삶을 살면서도 만족스럽지 않다. 배울 만큼 배웠고 알 만큼 알기에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생각은 이상이고 행동은 현실이었다. 사회 생활하는 아내가 못마땅하고 집안일 하는 남편이 못미덥기는 이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둘은 그토록 거부하고 싶어 했던 고정된 성 역할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체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과-가정이라는 굴레, 현실이라는 멍에
일 년.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딱 일 년이었다. 가을에 전업주부를 선언한 토머스는 이듬해 가을, 다시 직장으로 출근한다. 학과장으로 부임했던 토니 역시 일 년 만에 가정으로 돌아온다. 보란 듯이 새로운 길을 선택했던 부부가 계획에 없던 문제들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건 자유도 자아도 아닌 안정적인 삶이었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 부부. 달라진 게 있다면, 아이는 역시 엄마가 돌봐야 하고 남자가 있어야 할 곳은 회사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다. 이들의 삶은 왜 이토록 제자리걸음일까. 두 사람은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인이고, 생활인은 현실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딸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던 토머스는 생각한다.
사랑, 생존, 투쟁과 즐거움, 행복과 슬픔, 믿음, 삶 자체의 모양새와 궤적이 모두 설명된다. 절대 설명되지 않는 하나는 현실이다.(17쪽)
현실은 토니를 가사와 육아에서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토머스를 가장이라는 책임감에서 놔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실패했거나, 적어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현실, 그 현실의 전모를 밝히는 일이다. 남자에게는 권위가 없었고 여자에게는 남자 못지않은 경제력이 있었다. 성 역할 문제를 고착화했던 과거의 현실이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중적인 의식이다. 머리로는 철저하게 밀어내는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정작 마음은 밀어내지 못하는 상황. 말하자면 부부가 처한 현실이란, 미래로 가 있는 이상과 과거에 머물러 있는 현실의 간극이라 하겠다.
■성급하게 평등을 전망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비판
국내의 한 일간지가 지난 5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20, 30대 젊은 남성의 70%가 전업주부의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자는 상대적으로 낮은 46%가 남편이 집안일 하는 것에 찬성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신 모계 사회의 출현을 예고했고 어떤 사람들은 남녀평등 사회를 낙관했다. 기사가 말하는 건 여기까지다. 살아 보고 나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실제로 전업주부로 사는 남성들의 만족도는 어느 정도이며, 왜 성 차별에 시달려 온 여성들이 남성보다 보수적인 반응을 보이는지, 성 평등을 전망하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들은 아직 이야기되지 않았다. 그 빈 공간에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이 있다. 작가는 전통적 의식과 현대적 의식 사이에 서 있는 부부의 “반역”과도 같았던 일 년을 보여 주며 70%가 담보하는 장밋빛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다. 그 찬물은 냉정하고 매정하다. 하지만 레이철 커스크의 냉정함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시선이 환상에 기댄 낙관보다 사실에 근거한 냉소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이 시대의 성 역할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레이철 커스크가 21세기 페미니즘 문학의 대표주라고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옮긴이의 말
도서 | 제목 | 댓글 | 작성자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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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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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히 | 2019.5.9 | |||
나만? 모두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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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