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퍼스와 코코는 어느 날 밤, 바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눈다. 한없이 유쾌하고 친밀한 대화 끝에 기약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은 또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사랑에 빠져든다. 성적으로 방탕하고 쿨한 듯 보이지만 한없이 여린 코코와 순수하고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루퍼스의 운명적인 연애담. 서로가 서로에게 띄우는 절절한 연애편지.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와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3대 여성 작가로 평가받는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 『추잉껌』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야마다 에이미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섬세한 문체와 무라카미 류의 대담한 에로티시즘을 연상시키는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소설들로 독자들에게 “120% COOOL”한 감각을 선사해 왔다. 『추잉껌』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자전적 연애 소설로, 남편 크레이그 더글러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사랑스럽게 그려 낸 작품이다.
도대체가 거짓말쟁이다. 몇 년 전의 인터뷰를 보니, 나, 절대로 결혼 같은 거 안 한다고 태연자약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나는 결혼했고, 결혼도 뭐 나쁘지는 않아, 라는 말로 친구들을 아연하게 만들고 있다. 대체 이런 심경의 변화는 어디서 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그래서 소설을 써 보았다. 물론 소설은 창작일 뿐, 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첫째, 나는 코코처럼 인간이나 세상을 잘 아는 여자가 아니고, 내 남편도 루퍼스처럼 귀여운 청년은 아니다. 그렇지만 역시 소설이란 작가의 마음을 비추는 허구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내면의 불편한 자유를 확실히 정돈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작가의 말」중에서
야마다 에이미는 서른한 살 때인 1990년, 크레이그 더글러스와 결혼한다. 그녀의 오랜 연인이었던 크레이그 더글러스는 뉴욕 출신의 흑인 군인으로, 그녀의 파격적인 데뷔작 『베드 타임 아이스』의 모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야마다 에이미가 요코하마 미군 기지에서 일할 때 알게 돼 오랫동안 동거하다 결혼했다.야마다 에이미는 메이지 대학 문학부에 입학한 뒤, 만화 연구회에서 활동했고 만화가로 데뷔했으나 대학 4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으며, 습작 기간 동안 도쿄 긴자에서 모델 일과 호스티스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세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력을 갖고 있다. 흑인 군인 더글러스 크레이그와의 동거와 결혼 역시 파격적인 이슈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실제 삶에서도 늘 예외적이고 파격적인 면모를 보여 준 그녀의 성향은 작품 속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변두리의 삶, 남의 이목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감각만으로 밀어붙이는 삶. 야마다 에이미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매순간을 절실한 문학적 체험의 현장으로 기록해 왔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작품이 생생함을 잃지 않고 우리에게 늘 살아 있는 감각을 전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애정이란 오감의 기억을 축적해 가는 과정
『추잉껌』의 주인공 코코는 건강미 넘치는 매력적인 일본 여성, 루퍼스는 일 때문에 일본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루퍼스와 코코는 어느 날 밤, 바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눈다. 한없이 유쾌하고 친밀한 대화 끝에 기약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은 또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사랑에 빠져든다. 성적으로 방탕하고 쿨한 듯 보이지만 한없이 여린 코코와 순수하고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루퍼스의 운명적인 연애담. 마치 대화를 하듯, 코코와 루퍼스의 서술이 번갈아 가며 한 챕터씩 등장한다. 코코는 결국 유부남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루퍼스와 연애를 하기 시작한다. 이들을 지켜보는 코코의 친구와 루퍼스의 친구가 너무 빨리, 깊이 빠져드는 것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로 이들의 사랑은 뜨겁다.육체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는 두 사람이지만 차츰 마음의 중요성, 함께 쌓아 온 시간의 무게, 상실에 대한 두려움, 죽음이 상대방을 앗아갈지 모른다는 불안이 관계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 루퍼스가 보이지 않으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나 걱정하며 미친듯이 그를 찾는 코코. 집 근처에 소방차가 보이자 혹시 코코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걱정하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루퍼스. 이들은 같이 살기 시작하고 점차 많은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면서 단순한 섹스 관계를 넘어서 보다 깊은 관계로 들어선다.많은 연애를 하면서도 한 번도 남자와 미래를 꿈꿔 본 적이 없는 코코. 눈앞의 것, 날것 그대로의 욕망에만 집중해 온 코코의 일상에 결혼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퍼스가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던 뉴욕에서의 밤, 코코는 처음으로 결혼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시종 유쾌하고 또 유쾌했던 가족들과의 상견례를 거쳐, 두 사람은 곧 결혼한다. 양쪽 집안의 가족들 모두 서로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루퍼스의 아버지는 단지 어깨를 으쓱하며 코코를 새 딸로 받아들였고, 코코의 아버지는 가정환경, 수입, 직업 등은 입에도 담지 않고 밤새 함께 체스를 두며 루퍼스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다. 마치 마법의 추잉껌 하나를 받은 것처럼, 맛있는 풍선껌을 씹듯 두 사람의 입은 늘 움직이고 있다. 마치 서로가 한 몸인 듯 여기며, 뉴욕의 프레첼 과자처럼 두 사람은 서로 다리를 꼰 채 잠이 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띄우는 절절한 연애편지.
불안이 없는 마음은 사랑도 연애도 아니다
일본의 여성 작가들이 대체적으로 가족의 붕괴와 같은 관계의 단절에 관심을 기울였던 데 비해 야마다 에이미는 육체를 통해 오히려 관계의 가능성에 주목해 왔다.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 속 여성들은, ‘남자의 몸에 대한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이는 동시대 작가 중 누구보다 앞선 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추잉껌』에 이르러서는 섹스나 질투, 줄다리기 같은 차원을 넘어선 내면의 깊은 울림을 이 소설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밝고 즐겁게 웃는 얼굴밖에 보이지 않을 동안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맛있는 부분만 집어먹으며 만족하는 인간이 진정한 맛을 알 리 없다. 사람을 사랑하는 행복은 늘 불안과 함께한다. 불안이 없는 마음은 사랑도 연애도 아니다. —본문 중에서
야마다 에이미는 “세련되고 도시적인 사랑 같은 것엔 흥미가 없다. 어차피 연애를 할 바에는 가치관이 붕괴될 정도의 연애가 좋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말대로 이 책에서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상반된 성격의 남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랑을 가꿔 나가고자 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감미로운 굴욕, 오로지 갈구하고 보답하고 싶다는 기분, 장식 따위 필요 없는 단순한 사랑. 야마다 에이미가 그려 낸 사랑은 여전히 시원시원하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만을 향한 뜨거운 애정,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까지 치환되는 속 깊은 사랑에 이르면, 야마다 에이미의 연애소설이 무엇을 향해 진화해 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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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도서 | 제목 | 댓글 | 작성자 | 날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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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에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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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블링 | 2024.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