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도시
시리즈 오늘의 작가 총서 41 | 분야 한국 문학, 오늘의 작가 총서 41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알리지 않았니?”
고통을 쉽게 발설하지 않는 이들의
다문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주는 침묵의 귀
‘타자의 작가’ 조해진 첫 소설집
작가 조해진의 첫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가 오늘의 작가 총서 41번으로 재출간되었다. 2008년에 묶인 소설집을 2023년에 다시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가장 먼저, 조해진이 작가로 살아 온 시간 중 15년을 거슬러 읽어 보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15년 전, 젊은 소설가가 심은 묘목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 든든한 둥치와 넓은 가지를 드리운 나무를 가지게 된 한 명의 소설가가 그 나무를 갖게 되기까지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여행일 것이다. 시간을 반대로 사는 일은 오직 문학에서만 가능하다. 15년 전 조해진은 무엇을 심었을까. 작가는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들의 그림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그림자 속에 살기 때문에 고통을 발설하지 못하게 된 이들의 작은 목소리를 채집하는 귀가 되기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가족을, 온기와 기댈 곳을 잃는다 하더라도 결국 살아갔다는 증언을 듣는.
『천사들의 도시』에는 삶의 기본값이 불운이고 불행이라는 듯,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깊고 어두운 고통의 구덩이에 빠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모어를 모르는 입양아, 외롭고 춥던 밤 에이즈에 걸리게 된 여자, ‘잘살고 싶다’는 욕망에 휩쓸려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는 남자, 결혼 이민을 왔으나 홀로 한국에 남게 된 고려인,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남자와 시력을 잃고 무대에 설 수 없게 된 연극배우 등. 조해진의 첫 번째 소설집은 우리가 지닌 고통의 언어가 각자 다르다는 사실, 그래서 서로의 발화를 온전히 알아듣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동시에 그럼에도 누군가가 당신의 언어에 닿아 보려 애쓰는 순간을 기록해 두고자 한다. 조해진은 자신의 고통이 번역되게 두지 않겠다는 고독한 인물들 곁에서 기어이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고통은 작가의 문장을 입고 우리 앞에 드러난다. 15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고통을 배울 시간이다.
■불안과 슬픔, 분노와 고독의 굴레에서
『천사들의 도시』에서 조해진은 인간을 채우는 구성 물질 중 보이지 않지만 힘이 센 집념들을 파고드는 데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인간인 우리가 버려지고 병들고 홀로 되는 일에 얼마나 나약한지 알고 있다. 더하여, 우리가 외부로부터 받은 불안과 슬픔을 마음속 깊이 끌어안고 그것을 헤집는 데 얼마나 몰두하며 살아가는지, 고독에서 놓여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조해진의 인물들이 겪는 고독의 시간은 그들 각자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상처를 끌어안게 된 삶을 아는 작가는, 동시에 우리가 할퀴어진 몸으로 웅크리고도 얼마나 강인한지 또한 알고 있다. 상처를 붙들고 사는 삶도 삶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해진의 외롭고 분노에 찬 인물들은 슬픔의 자리에 붙박여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눈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을 좇고(「천사들의 도시」), 텅 빈 가구점에서도 파티를 하기 위해 상을 차리고 노래를 부르며(「인터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빌딩을 오르내린다(「지워진 그림자」). 캄캄한 방 안에서 춤을 추고 울고 웃는다.(「기념사진」) 동행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여자와 버스에 오르고 길을 나선다.(「여자에게 길을 묻다」) 삶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우리 안의 존재론적 불안의 굴레를 끊을 길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천사들의 도시』에 사는 인물들의 궤적을 좇다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굴레를 잘 쓰고 내일로 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희미한 힌트를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이 믿었던 세상이 무너져 내려도 “이번 주말엔 꼭 (……) 코트를 세탁소에 맡겨야겠다는 다짐을 새로이”(「그리고, 일주일」) 하는 한 사람처럼.
■고통에 질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들
일하던 은행에서 돈을 횡령한 남자(「지워진 그림자」)는 가스레인지 하나, 냄비 하나, 라면 한 개를 살 만큼의 동전을 가지고 거리에서 산다. 매일 똑같은 자책과 굴욕의 나날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말라 가는 선인장 화분을 만난 뒤로 그의 시간은 조금 더 빠르게 흘러간다. “연초록에서 짙은 초록으로” 변해 가는 선인장을 보면 사람답지 않은 삶,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삶에도 든든한 마음이 차오른다. 누명을 쓰고 복역을 했지만 진범이 잡히고도 삶이 회복되지 않던 남자(「기념사진」)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순간을 안다. “3년 전,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CCTV 카메라에 찍혔던 그날처럼, 그때 남자에게 절실하게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처럼” 그는 지금 시력을 잃은, 그래서 꿈도 잃은 여자에게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따뜻한 “쇠고기죽”으로 속을 덥혀 주고, 머리를 감겨 준다.
조해진은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고통에 고립된 사람들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발견하는 작가다. 그렇기에 고통에 고립된 사람들에게 한 방울의 물, 한 줄기의 빛이 얼마나 달고 밝은지 누구보다 먼저 발견하는 이 역시 조해진일 것이다. 조해진의 첫 번째 소설집인 『천사들의 도시』는 작가가 쓴 ‘개정판 작가의 말’처럼, 이후에 그가 쓴 다른 소설집이나 장편소설에 비해 “차고 어둡다”. 『천사들의 도시』에서 조해진이 그리는 인간은 대부분 소중한 것을 잃었기에 차고 어두운 존재로, 숨쉬기 어려운 마음 상태로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고통에 질식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망가지고 무너지지만, 언제나 소중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막처럼 물기 없고, 망망대해처럼 닿을 것 없는 고통의 시기에도 조해진의 인물들은 누군가를 발견한다. 조해진의 소설 세계를 비출 작고 미약한 빛이 『천사들의 도시』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에서
불안과 집착이 현실을 배반하지 못하듯 일상도 나를 배반하지 못한다. 나의 삶은 3년 전과 같았고 그 똑같은 풍경은 내가 태어난 그날로부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현되고 또 재현되어 왔다. 가끔은 누군가 이미 한 번 살았던 삶을, 그 사람이 지겨워서 버리고 도망간 삶을 대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사들의 도시」, 33쪽)
문득, 오래전에 졸음을 견디며 보았던 독일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가 잠깐 생각났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들 곁에 머무르며 그들의 좌절과 희열과 눈물과 웃음을 지켜보고 공유했던 과묵한 천사들. 물론 나와는 어떤 개인적인 회로로도 엮여져 있지 않은 이 중년의 남자가 나를 위해서 무언가 구체적인 행동을 해 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으며 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의 고통을 지켜보고 공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이 남자뿐이란 걸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주일」, 60쪽)
지금 그녀의 시선은,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아주 먼 곳을 헤매고 있다.
사실은, 나는 이 부엌이 좋아서 여기에 왔어요.
그래서, 이곳에 존재하기에, 여기에 오기 위하여 그녀가 잃어버려야 했던 시간들이 중앙아시아의 진주, 옛 실크로드의 중심지, 과거 소련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농업 국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어떻게 흘러갔을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다. 그녀가 만약 지금 쓸쓸하다면 그건, 그 짐작할 수 없음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77쪽)
언젠가는 M에게도 유일하게 터득한 이 명쾌한 삶의 진리를 말해 줄 것이다. 그것이 너의 인생이라고, 그 어디에도 함부로 편입될 수 없는 삶이, 잔인할 만큼 고독한 인생이 바로 너의 것이라고, 그녀는 침착하게 얘기해 줄 생각이다. 물론 그때는 M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것이며 말을 더듬는 어리숙한 행동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등 뒤에」, 155쪽)
■작가의 말
부끄러웠고 숨기고도 싶었지만, 결국 애틋함이 남았다. 15년의 격차를 두고 이 소설집을 처음 접하는 독자분들에게도 그 애틋함이 전달되기를 소망한다.
(……)
15년 전과 달리 나는 더 이상 신인 작가도 아니고 청년도 아니지만 소설에 대한 간절함은 똑같다고 생각한다.
간절해서 계속 쓴다.
계속 쓸 수 있어서 살고 있다.
■추천의 말
『천사들의 도시』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나는 오래 사랑할 작가를 찾았다는 확신에 벅찬 상태였다. 조해진 소설가는 이후 그 확신을 더 깊고 흔들림 없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작가의 첫 책을 다시 읽으니, 15년의 진실한 궤적 위를 함께 걷는 듯하다. 도외시하기 쉬운 그림자와 통증을 다룬 소설집이 시간이 흘러서도 여전히 이토록 유효한 것에 슬퍼지기도 하지만, 이야기들과 사람들이 대화하며 서로를 멀리 데려가기도 한다는 것을 믿는다.
-정세랑(소설가)
“남자가 아는 것은 지금 여자에겐 누군가 필요하다는 사실, 그것뿐이었다.” (……) 이 문장을 적을 때 이 작가는 솔직하고 필사적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 이 작가가 아는 것도 그것뿐일 테니까. 지금 ‘그들’에겐 누군가 필요하다는 사실, 그들의 말을 들어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대신 전해 줄 그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그 ‘누군가’가 되기 위해 애쓴 시간 동안 이 일곱 편의 작품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가 바로 그들이니까, 그가 타자이니까. (……) 진정한 작가들은, 이렇게 조금씩, ‘나는 타자다’의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 이 책은 조해진의 과거이고 우리의 미래다.
-신형철(문학평론가) / 작품 해설에서
천사들의 도시 7
그리고, 일주일 37
인터뷰 71
지워진 그림자 103
등 뒤에 133
기념사진 163
여자에게 길을 묻다 195
수록 작품 발표 지면 269
작품 해설_신형철(문학평론가) 270
개정판 작가의 말 284
초판 작가의 말 287
독자 평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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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블링 | 2024.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