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독립국의 엘리트 청년에서
언론사 주필, 4선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으로
남재희, 그리고 그가 만난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
서울대에 두 번 입학한 천재, 38세에 중앙 일간지의 편집국장이 된 언론인, 보수 여당의 대표 권한대행을 지낸 중진 의원, 진보 진영의 멘토……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는 수식어다.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서울신문》 주필, 서울 강서구 4선 국회의원, 김영삼 정부 노동부 장관을 지낸 남재희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 지난 20년간 쓴 글들을 집대성한 이 책은 정치 평론과 인물 분석을 통해 현대사를 돌아보고, 조정자이자 중재자로서 족적을 남긴 저자의 극적인 삶을 회고함으로써, 시대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개인의 체험은 어떻게 역사로 환원되는지 보여 준다.
거인들의 시대를 돌아보다
남재희, 그리고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들
1945년에 해방이 되고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정치인, 군인, 언론인, 학자, 종교인 등 엘리트 집단을 배경으로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해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 이 거인들의 시대에 남재희는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였다. 언론에 몸담은 20년간 치열하게 체제 내 개혁을 도모했고, 정치에 입문한 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역대 정부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갈등 해결에 힘썼다.
이 책 『시대의 조정자』는 남재희의 인생 역정을 담은 회고록이자 한국 현대 정치사의 기록이다. 보수와 혁신의 경계를 가로지른 한 지식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가는 동시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을 다시 불러냄으로써 한국 현대 정치사를 새롭게 조망한다.
남재희에 관하여
– 굴곡진 역사가 바꾸어 놓은 삶의 궤적
남재희는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1933년에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 서울대 의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그의 관심은 철학을 향해 있었다. ‘순수철학’이 아닌 ‘사회철학’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1954년, 같은 대학교 법과대학에 시험을 다시 쳐서 입학한다.
1957년 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대통령의 양자 이강석이 부정한 방법으로 편입학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남재희는 학생총회 의장으로서 법대생들을 이끌고 동맹휴학으로 맞섰다. 살아 있는 권력을 상대로 일개 대학생이 앞장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 경로를 바꾸어 놓았다. 자유당 정권하에서는 ‘관(官)’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혔기에, 남재희는 졸업 후 언론계로 발을 들이게 된다.
– 보수 언론의 편집국장으로서 체제 내 개혁을 추구하다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남재희는 《민국일보》 정치부로 자리를 옮겨 ‘혁신 정당’들을 담당했다. 훗날 보수 정당의 정치인이 되었는데도 진보 인사들과 어울리게 된 본격적인 계기다.
5·16 이후에는 《조선일보》 기자가 되어 문화부장과 정치부장을 지내는 등 빠르게 승진했고, 1972년에는 《서울신문》 편집국장이 되었다. 불혹이 되기도 전에 중앙 종합 일간지의 편집국장이 된 것이다.
남재희는 체제 내 개혁을 도모한 언론인이었다. 당시 정부 기관지로 취급되었던 《서울신문》에 속해 있으면서도 유신 체제에 비판적인 글을 쓰기도 했다. 다만 비판만이 아니라 합리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이의 공감을 끌어냈다.
1970년대를 강타한 언론 자유 수호 운동의 바람은 《서울신문》에도 불어왔다. 기자들이 투쟁을 외치며 들고일어나자 그는 사장을 설득해 과잉 대응을 하지 못하게 막고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결국 《서울신문》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서 발생했던 대량 해직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저자가 간부로서 중용의 자세를 취한 덕택이었다.
– ‘폭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대화와 타협의 정치인
《서울신문》 주필로 있던 남재희는 정계 입문 권유를 받았다. 《서울신문》에 계속 남는다면 경영진이 되는 길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였다. 1978년 12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여당의 공천을 받아 서울 강서구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제13대까지 같은 지역구에서 내리 네 번을 당선된 남재희는 여당의 중진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주류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중진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민주화합추진위원회(민화위)가 구성되었다. 전임자인 전두환에게서 정권을 인수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저자는 민화위의 국민화합 분과위에 소속되어 1980년의 광주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결정하게 되었다.
남재희는 오랜 기자 생활을 통해 정치 언어를 다루는 감각을 습득한 터였다. 전 정권이 ‘폭동’으로 부른 것을 ‘의거’나 ‘혁명’으로 바꾸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심 끝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작명인 ‘민주화 운동’을 선택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이 탄생한 내막이다.
저자는 대화가 통하는 정치인으로 꼽혔다. 1984년에 민주정의당 당사를 점거한 대학생들이 면담을 원한 사람 중 하나가 남재희였다. 친기업 성향이기 마련인 여당 의원인데도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아,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한 노무현은 언론 인터뷰에서 “남재희 의원 같은 괜찮은 의원도 있더라.”라고 높이 평가했다.
– “각하, 안 됩니다!” 대통령 앞에서 홀로 반대한 장관
저자가 노동부 장관을 지내던 1994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파업이 장기화하자 정부 내에서는 공권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청와대 수석도 노동부 차관도 모두 동조하는 상황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고 대통령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하자, 남재희는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각하, 안 됩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평화롭게 수습하겠습니다.”
무작정 반대하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노동 문제에 밝은 그는 이미 이번 파업의 내막을 파악한 터였다. 정부가 개입하면 오히려 사태가 더 커질 수 있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과천 노동부 청사로 돌아와 보니 공무원들은 장관이 곧 파면될 것이라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공권력 투입은 없을 것이라는 소식에 노사가 모두 유연한 자세로 돌아서 협상이 타결된 것이다. 파업은 끝났다. 저자의 용기와 소신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남재희의 합리적이고 적절한 판단은 정부의 노동 정책에 대전환을 가져왔다. 이제 정부는 민간 기업의 파업에 공권력 투입을 자제하게 되었다. 또한 이날 이후 현대중공업은 약 20년간 평화를 누리게 된다.
한국 정치에 보내는 제언
– 민주화 이후 반복되는 화두인 선거구제 개편, 어떻게 볼 것인가?
언론인 시절부터 명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떨친 저자는 정계 은퇴 이후 다시 논객으로 돌아온다. 주기적으로 화제에 오르곤 하는 선거구제 개편 문제에 관해서도 통찰력 있는 글을 쓴 바 있는데, 1988년의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그 1선거구 1인제가 김영삼 씨의 제1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이 제2야당으로 전락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김대중 씨에 뒤처져 제2야당의 당수가 된 김영삼 씨는 그 열세를 참기 어려워 3당 합당으로 진입한 것으로 본다.”
국회의원 선거는 본래 하나의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치러졌는데, 민주화 이후 야당의 요구로 하나의 선거구에서 한 명만 뽑는 소선구제로 바뀌었다. 이때 소선거구제를 채택하자고 가장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 김영삼이었는데, 이렇게 바뀐 제도가 오히려 김영삼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선거구제 개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주장이 실상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진 셈속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또한 1988년의 선거구제 개편으로 야기된 결과가 정계 개편으로 이어져 우리 현대사의 흐름까지 바꾸었음을 꿰뚫어 낸다.
– 진보 세력도 북한에 할 말은 해야, 보수 정부는 승자 독식을 경계하라
저자는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원로답게 양측에 매서운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관계가 인간관계와 다를 바 없다면서 진보 세력이 북한을 상대로 “좋은 말만 할 수는 없고 필요하다면 듣기 싫은 소리도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렇게 해야 북한 인권에 보수적인 사람도 설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른바 ‘진보 정당’을 비판하며 현실에 뒤처진 인식과 경직성을 예로 드는데, 그가 우려한 대로 훗날 진보 정당의 몰락은 현실이 되고 만다.
정권 교체로 집권한 보수 정부를 향해서는 승자 독식을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ABC(Anything But Clinton, 클린턴이 한 것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방침을 고집하며 전 정부를 부정하기만 한 탓에 실패했음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 혐오에 편승하는 풍조도 비판하는데, 잊을 만하면 나오는 내각제 개헌 논의에 대해서는 대통령제라는 헌정 경험 70년이 “섣불리 버리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고 반론한다. 그리고 국회의원 수를 줄이겠다는 공약에는 인기에 영합하려는 의도만 있을 뿐 현실적 판단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보수와 혁신의 경계를 가로지른
‘체제 내 리버럴’의 기록
저자는 대학 시절에 조봉암을 만난 것을 시작으로 진보 인사들과 두텁게 교류하면서도 몸은 보수 언론과 보수 정당에 둔 경계인이었다. 또한 극단의 시대를 살아간 언론인, 정치인, 행정가로서 철저한 자기 객관화를 통해 항상 균형 잡힌 시각으로 경청하며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조정자였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의 증언자로 남재희만큼 어울리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식민지의 신민으로 보낸 어린 시절, 전쟁 중에도 놓지 않은 학업, 신생국의 엘리트로서 지닌 사명감 등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언론인, 정치인으로서 만난 인물들의 이야기는 양면적이고 다채로워 흥미를 자아낸다. 군인 출신 대통령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3김으로 불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당대를 풍미한 언론인 송지영, 최석채, 이영근, 천관우, 송건호 등이 저자의 생생한 증언 속에서 되살아나고 재조명된다.
남재희는 자신이 뚜렷한 원칙이나 주의보다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따랐다고 고백한다. 또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굽힐 수 있는 것이 정치이며, 임기응변과 장기적 안목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론이 사라지고 양극단으로 치닫는 현시대에 그의 회고는 깊은 울림을 준다.
추천평
우리 정치가 점점 더 대화와 타협이 없는, 극단적 투쟁만 남는 제로섬게임이 되어 가는 현실에서 남재희 선생의 행보는 진영을 넘어 대화가 가능한 진정한 보수로서, 이념이 아닌 당대의 실천 가능한 현실을 먼저 고민한 사람으로서 지닌 미덕이 있다.
–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머리말 보수와 혁신을 넘나든 ‘체제 내 리버럴’
책을 내면서 상식이 바로 서는 사회를 바라보며
1부 나의 인생 역정
1 해방 전후, 어린 시절 이야기
2 죽산과 그 주변의 시대
3 하버드 대학교 유학기
4 ‘정부 기관지’라는 《서울신문》 이야기
5 우리 정치는 소극(笑劇)일 수도
6 로키산맥 산허리에서의 꿈같은 2주
7 ‘광주 폭동’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8 바이칼호에서 국운을 생각한다
9 나의 책 수집벽과 난독의 경력
2부 한국 정치에 보내는 제언
1 ‘운동 정치’와 함께 요동치는 총선거
2 호랑이 등에서 내려오라
3 보수 세력도 후련해할 정도로 ‘북 인권’ 제기해야
4 지금의 헌정 질서 섣불리 바꾸면 대혼란
5 한국 노동운동을 안타까워한다
6 ‘무기력’보다는 ‘때 묻은’ 능력
7 이명박 행정부에 우선 기대하는 것
8 민주노동당의 애가
9 한국 진보 정당들의 장래
10 대항 문화의 형성이 발전의 추동력
11 신자유주의 홍수 속, 둑에 구멍 내는 격
12 임기 문제와 정치 사회의 다원성
13 “금일불가무 최지천화전론”(今日不可無 崔遲川和戰論)
14 ‘우애민주주의’를 바라며
15 뉴딜 정책과 노동 문제
3부 시대와 인물로 보는 한국 정치
1 삼김 일노의 회상
2 무인 정권 시대의 스케치
3 요지경 정치에 대응하는 아홉 가지 정치인 유형
4부 인물에 관한 회상
1 이병주 탄생 100주년 그를 회고한다
2 민기식 장군의 생애와 한국 정치의 단면들
3 우인 송지영 이야기
4 한국 정치사와 언론인 이영근
5 장세동, “전(全)통은 발광체, 이종찬은 반사체”
6 ‘서두현령’(鼠頭懸鈴)의 화두
7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포섭하려 했던 조세형 의원
8 “우리 이제 아픔의 껍질을 깹시다”
맺으며 편집국장 출신 ‘소신과 배짱’ 남재희의 파란만장한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