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남아 있는 힘을 모아 치약을 짠다손끝이 얼얼할 정도로
아직 더 남은 것이 있다
– ‘여력‘ 중에서 – P135
#1.
우리는 트램펄린 위에서 점프하며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멀리 벗어날 수 있다”. “아무리 높이 뛰어오르더라도/ 반드시 그곳에 착지”한다(‘트램펄린’). 조해주의 시는 트램펄린을 닮았다. 그의 시 속 화자들은 아주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순간 속에 잠시 환상을 보지만, 어느새 일상으로 돌아와 삶을 지속한다.
마치 삽화처럼 삽입된 일상 속 환상에서 그를 현실로 귀환시키는 것은 아주 사소한 접촉과 대화다. 공원에서 농구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중 자신만의 공상에 빠졌다가도 “저기요,/ 그것 좀 이쪽으로”라는 말에 곧장 현실로 돌아온다(‘파리공원’). ‘그’와 함께 걷다가 환상적 상상 때문에 걸음이 뒤쳐지지만 “어느새 멀어진 그가 나에게 손짓”하는 모습을 보곤 곧장 그곳으로 따라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에게’).
그의 시를 관통하는 삽화적 공상들은 마치 시 그 자체의 모습을 닮았다. 시는 삶을 뚜렷하게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똑같이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도 하나의 공상으로써 빈 공간(void)을 선사한다. 일상 속에서 자리를 지키면서도 더 먼 세상을 내다볼 수 있게 해 주는 힘. 그것이 조해주가 생각하는 시의 속성이자 문학의 속성, 나아가 예술의 속성이 아닐까.
#2.
어떠한 입자들이 모인 물질에서 빈 공간(void)의 크기는 그 물체의 무게를 더 가볍게 만들어준다. 똑같은 외형일지라도 가득 차 있는 건 무겁지만 빈 공간이 생기면 무게가 가벼워진다. 이 빈 공간들은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마치 해면체의 구조처럼.
무겁다고 언제나 강한 것이 아니듯, 가볍다고 언제나 약한 것은 아니다. 통상 우리는 무게와 강도를 연결지어 생각하기도 하지만 무게와 강도는 엄연히 별도의 척도이다. 이러한 직관과 감각의 괴리 또한 조해주는 놓치지 않는다. “먹다 만 것도/ 먹은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안방해변’), 페인트는 “노랑 파랑 주황 다른 색채여도 같은 냄새”를 내는 액체라는 사실을 감각한다(‘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달라 보여도 같은 것, 같아 보여도 다른 것을 명확히 포착해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빈 공간을 통해 충격을 흡수시켜 더 강한 물체가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빈 공간은 탄성을 만들어 내 가벼우면서도 충격을 더 부드럽게 감싸안는다. 트램펄린이 빽빽한 직조가 아닌 그물 같은 구멍을 담은 이유도 이 때문이리라. 게다가 트램펄린은 엄청난 탄성력으로 우리가 평소 느끼는 중력을 아주 극소량으로 줄여 가볍게 만들어낸다. 그래서 다치지 않고 더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다. 조해주가 말하는 <가벼운 선물>도 이러한 ‘가벼움의 강함’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빈 공간의 가벼움을 통해 우리는 충격을 받아들이는 법을 연습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넘어지는 순간에/ 나름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누수’).
#3.
삶의 빈 공간으로써 작용하는 삽화적 공상들은 하나의 빈 공간으로써 우리의 삶을 가볍고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시는 우리가 일상을 더욱 단단하게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체조 선수가 완벽한 공중회전 뒤에/ 양팔을 벌리고 착지하는” 아주 극적인 순간에도 그는 “내일은 잎차를 마셔야지/ 커튼을 달아야지/ 동네 문화센터에서 배드민턴도 배우고//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아야지”라며 일상을 계획한 채 “TV를 끄고/ 등을 돌려 눕는” 사람이다(‘체조 경기를 보다가’). “인간으로 매일 출근하는 것도 일 같아서” “주말이 삼 일이었으면 좋겠어/ 아니 사 일”이라고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주말’).
그리고 시가 만들어 낸 빈 공간은 우리에게 여력이 남아있음을 증명하는 듯 보인다. 언제든 충격이 다가와도 맞설 수 있다는 희망. 삶에서 아무리 도망치고 싶어도 잠시의 삽화적 공상을 통해 그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믿음. 이러한 마음 덕에 우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남아 있는 치약을 모두 짠다// 손끝이 얼얼할 정도로// 아직 더 남은 것이 있다”(‘여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