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총명한 아이가 있었다. 의욕도 있어 게으르지 않고,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야망과 인내심으로” 더 열심히 노력하며 상급학교에서 배울 것들을 선행하는 아이. 아들이 대학공부를 마치고 관료가 되는 것이 최대의 야심인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에게 그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는 기대 이상이었다. 한스는 특별한 존재, 재능있는 아이였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아이가 총명하여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고 신분상승을 가져다줄 골든 티켓처럼 공부란 그런 수단이 되어도 된다고 믿었다. 아이의 성과에 자신의 공적이 있음을 자랑하고 싶은 젊은 목사, 가문의 영광이 될 기숙학교에 당당히 차석으로 입학한 아들이 대견했을 아버지, 온 마을의 기대가 한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지. 떨어져도 또 다른 삶이 있다는 말 따위는 한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 스트레스를 괜한 나무에게 풀었음을, 자꾸만 두통에 힘들었음을 그냥 간과했다. 아이가 원했으므로. 아이가 원하도록 어른들이 자꾸 주입했으므로.
이 책은 헤르만 헤세의 자서전적 소설이다. 수도원 학교를 중퇴하고, 시계공장에서 실습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성을 상실한 교육을 비판한다. 학생들이 어린 시절 누려야 할 것들을 반납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게 하는 어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또한 이 책이 발간된 20세기 초 저자는 정육점 주인이나 피혁공, 빵집 주인, 대장간 주인 등 노동자들을 다소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블루칼라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직업관의 변화가 여전히 필요한 듯 보인다. 아울러 기계 견습공으로 일하지만 “주 시험에 합격한 대장장이”라거나 “뒤늦게 하찮은 견습공”이 되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낙심하여 죽음에 이르는 주인공의 행동에 그 모멸감을 이겨낼 마음의 힘을 필요함이 느낀다.
한 젊은이가 우리 곁을 떠났다. 음악에 재능도 있었고 열정도 있었다. 노력도 많았지만 우울의 늪을 이기지 못하고 차마 지친 모습으로 떠난 그 청년을 보며 한스가 떠올랐다. 한스처럼 자신의 추락으로 수치심을 느끼진 않았겠지만 성공을 위해 뛰느라 마음이 망가지고 치유할 때를 놓친 모습을 보며, 지치면 쉬어도 좋다고, 계속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남보다 앞서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쉴 수 있는 시간을, 좀더 자신을 돌아보고 행복할 시간을 주었으면 좋았을텐데..
남보다 앞서고 싶은 이 땅의 한스와 부추기고 조종하는 어른들에게 경쟁보다 더불어 사는 삶을 권하고 싶다. 어느 정도의 경쟁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지치지 않도록, “나는 내가 너무 좋다”고 자신을 두 팔로 꼭 안아주던 <짜장면 불어요>의 주인공 기삼이처럼 직업의 귀천보다 인간됨을 소중하게 여기기를, 어떤 삶이든 존중받을 수 있는 인간됨을 먼저 가꿀 수 있는 교육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이 땅의 한스들이 좀더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