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특이한 소설이다.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도 열 발짝은 떨어져서 관조하던 주인공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과 주변 모든 것들을 그동안 관조해왔던 만큼 뼈저리게, 절절하게 체감하기 시작하고 그 감정이 독자를 덮쳐온다. 밋밋하고 건조하게 서술되던 초반부와 중반부에 익숙해져 있던 독자가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는 사이 이야기는 어느새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조차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소설을 읽어보면 후반부에 다다르기 전까지 주인공은 모든 일들을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일인 듯 무미건조하게 서술한다. 여자 친구인 마리와 보낸 즐거운 시간이나 레몽을 도와 아랍인 패거리와 싸운 일들, 심지어 그 아랍인 패거리 중 한 명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 일까지도 뫼르소에게는 그냥 어쩌다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 후 재판에서도 뫼르소는 딱히 변호사가 하라는 대로 하거나 배심원의 감성을 자극해서 재판을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사람을 쏴 죽였다는 말을 반복하며 결국 사형 판결을 받는다.
그렇게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뫼르소는 점점 자신이 죽는다는 현실을 피부로 체감하기 시작한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그동안의 무미건조한 서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인공의 감정이 해일처럼 들이닥친다. 자신을 면회하러 온 사제를 마구 비판하고 엄마의 죽음, 자신의 삶, 친구와 애인들에 대해 비로소 느끼게 된 감정과 깨달음들을 마구 쏟아낸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뫼르소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현실, 가족, 친구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아예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이방인이 아니고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세상으로부터의 이방인인 그는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엄마가 죽었더라도 바로 그다음 날 여자 친구와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자신의 애인을 두들겨 패고 싶어 하더라도 기꺼이 도와줄 수 있다. 하늘에서 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권총으로 쏴 죽이고 그 위에 다시 네 발의 총알을 박아 넣을 수도 있다.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사형을 받을 수도 있는 재판에서도 그냥 태양이 눈부셔서 사람을 쐈다는 주장을 그저 계속한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었고 굳이 거짓을 지어내서 말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죽음조차 의미 없는 일일 뿐인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굳이 귀찮게 거짓을 만들어내 말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듯 모든 것을 저 멀리서 관조하던 뫼르소는 후반부에 이르러서 갑자기 변한다. 사형 집행이 다가올수록 그는 자신의 죽음, 존재의 사라짐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전까지 겪어본 적 없던 뜨거운 감정들과 삶의 의미, 깨달음 등을 한없이 체감한다. 지금까지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아오던 뫼르소가 이방인으로써의 자신의 존재마저 사라지게 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비로소 이방인이라는 존재에서 벗어나 현실을 실감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뫼르소의 모습은 현대인의 모습과도 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많은 현대인들이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돈, 물질, 폭력과 쾌락 등에서 의미를 충족하곤 한다. 그러한 현대인의 모습은 뫼르소의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이방인은 영원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돈, 물질, 폭력, 쾌락 등)을 찾길 원하며 방황한다. 결국 마지막에 이방인에서 벗어난 뫼르소처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자신의 삶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면 현대의 많은 이방인들이 안식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