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두 번 봐도 아름다웠던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원작이다.
‘에블린’은 사회가 모범적인 여인으로 규정한 모습대로 살아왔으나 부부사이에 애정이 없고 자식마저 냉담하며, 스트레스를 군것질로 풀어 비만은 더 악화되어 간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보러 간 요양원에서 만난 노부인 ‘니니’로부터 50여년 전 휘슬스톱 마을과 그곳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슬픔에 잠긴 ‘이지’는 ‘루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루스는 약혼자와 결혼하기 위해 휘슬스톱을 떠난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루스’를 ‘이지’와 ‘빅조지’가 구출하고, 그들은 휘슬스톱에서 카페를 운영한다. 풋토마토 튀김을 비롯한 메뉴를 제공하는 그 카페는 부랑자들에게도, 가게 이용이 제한되었던 흑인에게도 열려있는 곳이었다.
50여년 전 휘슬스톱 사람들에게 일어난 이야기에 점차 빠져들던 ‘에블린’은 무기력하고 자신감도 없던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에 도전한다. 그 중간 과정에서 에블린이 눈곱만큼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젊은이의 차를 무려 여섯 번이나 들이받던 장면은 다시 봐도 통쾌했다.(요즘 내 마음에 분노의 감정이 많아서일까.)
영화는 이지와 루스의 깊은 우정을 그려냈다고 볼 수 있으나 원작엔 직접적으로 둘이 사랑한다고 밝힌다. 30년대 미국 남부는 인종차별이 극심하고 보수적인 지역이었을 터, 둘의 사랑을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분위기가 다시 읽으니 사뭇 부자연스럽기도 한데.
30년대의 이지와 루스의 사랑, 그리고 그들이 서로 절망과 폭력으로부터 구하는 연대, 30년대 휘슬스톱 사람들과 80년대 에블린이 노부인 니니를 통해 연결돼 에블린이 새 삶을 개척한다는 희망의 고리, 기억을 회상하며 끊임없이 말하려는 수다쟁이 할머니와 살집 있고 고운 피부를 가진 중년여성과의 대화와 간식타임 등 주제와 관계 없이 내가 꽂힌 부분은,
책 중간 중간 등장하는 휘슬스톱의 주간 소식지 <윔스통신>이었다. 통신원 윔스는 약 460개월로 추정되는 남아와 살며 벌어지는 황당무계한 일을 소식지의 말미마다 실었다. 그런 사건이라면 내가 많이 제보해줄 수 있는데, 내게 ‘니니’가 곁에 있다면 그녀의 수다에 지지 않을 자신도 있건만 아쉽다. (네, 460개월은 제 남편의 월령입니다.)
“이지가 루스를 만난 것처럼, 하나님이 한쪽 문을 닫으실 때는 반드시 다른 쪽 문을 열어 두신답니다.” 니니가 에벌린에게 해줬던 말이다.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이나 사랑은 절망에서 구출해준다. 시대와 상황에 관계없이.
다시 읽는 이 책에서 루스를 사랑했던 부랑자, 스모키론섬이 더 눈에 들어왔고(이지만이 그의 사랑을 알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은 서로 닮았을 테니까.) 외로웠던 그 사내의 마지막이 더 쓸쓸해 보였다.
부랑자뿐만 아니라 흑인들도 백인처럼 대해준 이지와 루스의 용기, 웃음을 자아내는 휘슬스톱 사람들의 유머, 읽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게 하고 온기에 휩싸이게 만드는 십시의 조리법까지, 책 곳곳마다 따스했다.
엄마의 입장에서 본 두 가지.
1. 빅조지의 쌍둥이 아들 아티스와 재스퍼의 삶은 판이했다. 환경보다는 유전이 우선할까.(유전보다 환경이 중요하다고 믿고싶다.)
2. 사고로 팔 하나를 잃어버린 루스의 아들 ‘스텀프’에게 일찌감치 ‘외팔이’란 뜻의 스텀프를 별명으로 지어준 이지의 교육관. 사춘기 스텀프에게 다리가 하나 없는 강아지와 노는 장면을 보여준 이지의 교육방식은 탁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