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에게는 카프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감정이 깃들어 있다. <베로치카> (체호프 단편선)의 <공포>, <베짱이> 등은 우울함으로 정의될 수는 없지만 그와 엇비슷한 종류의 감성이 떠올라 카프카가 생각났다.-사실 카프카는 평생 회사원이였고, 체호프는 의사였다는 사실을 보면 그들의 묘사가 이해는 간다-그러나 두 사람의 글들이 나로 하여금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베로치카> 중 <공포>를 읽는 순간 느꼈다. 내가 당장은 체호프를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마음과 목 사이 어딘가에 분명히 들어왔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러니까 거리와 상관없이 앞의 미래에 ‘현재의 나’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며, ‘현재의 나’가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내용들을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으로든, 뜨거운 머리와 차가운 심장으로든, 뜨거운 머리와 심장으로든, 최악의 경우에는 차가운 머리와 차가운 심장으로 표면적인 이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예감도 들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에 기분이 유쾌하지는 못했다. 현재 내가 느끼는 <베로치카>에 대한 감상은, 그들은 단지 삶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이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들이라는 것에 대한, 지상이 아닌 지상에서 더 자주 내가 사람들에게 종종 느끼고는 하는, 깊은 연민을 느꼈을 뿐이다. 이에 연민 이상의 감정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이해’나 ‘받아들임’-그것이 단지 뜨거운 머리를 통한 것일지라도!-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감은, 사형수가 된 기분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해의 깊이가 얼마 정도인지는 아무도 내게 알려 주지 않은 탓에 두려움이나 불쾌한 찝찝함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내가 체호프가 대단한, 혹 대단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당히 흥미로운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내가 느끼는 불쾌한 예감이 의도된 것이였다면, 나와 비슷한 사상을 가진 이들이 예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 전갈을 받고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면, 아니, 그런 이들이 없더라도 ‘나’라는 개인이 이러한 두려움과 괴로움을 느끼도록 계산한 것이라면, 그리고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이것은 계산된 것이라며 이야기한다면, 실로 그는 뛰어난 의사이자 작가이다.
최소한 계산 능력은 높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