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좋아한다. 일단 재밌고, 책장이 술술 넘어가며, 등장인물에 쉽게 몰입할 수 있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는 것은, 신선한 독서 경험이었다.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다가 결국에는 예상치 못한 여행지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초반부에는 조금 지루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읽을 수록, 이 화자의 입장이 알쏭달쏭하면서 그것이 또 긴장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화자이가 유명한 화가인, 마스지 오노는, 과연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그 자신 조차도 답을 모르는 듯 했다. 물론 이 책이 그를 이분법적으로 나눠 그리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하는 말을 들을(읽을) 수록, 그가 가진 논리가, 인생이 알쏭달쏭했다.
나의 과오를 알아채기에, 나는 충분히 명민한가? 내가 어느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그 세상속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바로 보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내 자신에게 물으며 읽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질문들을 비롯, 한 남자의 인생까지 마치 풍경화를 그리듯 써내려간다.
등장인물들이 그림을 그리는 장면들도 무척 흥미로웠다. 소설속의 새로운 그림은 마치 혁명과도 같고, 그에대한 토론은 어느 철학이나 정치 토론 못지 않게 치열했다. 그림에 신념을 담는 방식의 묘사도 흥미로웠다.
소설속의 등장인물들, 특히 노년에 이른 인물들은 저마다의 신념이 확고하지만, 그들의 신념은 시대에 따라 칭송받기도 하고 비난받기도 한다. 시대라고 해야할까,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 이라고 해야할까, 그것에 따라 평판이 달라진다. 세상은 절대 멈추지도 가만히 있지도 않는다. 그러한 세상에서, 인간의 신념은, 하나의 인생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내가 판단하는 나의 모습은 과연 진실한 것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장편소설을 읽으면, 주인공의 인생이 주인공으로 여겨지곤 했는데, 이 책은 하나의 풍경이 그려진 풍경화가 주인공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