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서의 고갱이를 담은 고대 그리스 대표 서정시 선집
[세계시인선29] 고대 그리스 서정시
시리즈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0주년 기념) 29 | 분야 세계시인선 29
고대 그리스 서정시 원문 최초 번역!
“250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인간 정서의 고갱이는 변하지 않는다.” ─ 황인숙(시인)
● 영원불멸의 신에서, 태어나고 죽는 인간에게로 눈을 돌리다
국내 최초로 원문에서 번역한 고대 그리스 대표 서정시 선집 『고대 그리스 서정시』가 민음사 세계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아르킬로스, 사포, 세모니데스, 히포낙스, 솔론, 아나크레온, 시모니데스, 테오그니스, 핀다로스 등등 열다섯 명 고대 그리스 대표 시인들의 서정시를 한 권에 담았다.
고대 그리스 서정시는 폴리스의 발전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했던 ‘개인’에 대한 의식과 그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운율에 맞추어 표현하며 시작되었다.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등이 신 혹은 신과 같은 형상의 영웅, 제왕, 귀족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전사를 칭송하던 신화와 서사시의 세계관에서, 개인의 일상적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서정시의 세계관으로 변화한 것이다.
최초의 서정시인이라고 불리는 아르킬로코스는 비록 방패를 내던지고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크게 외치며, 영예롭게 전사할 것을 권하던 사회적 통념을 비웃는다.
방패 때문에 사이오이족의 누군 우쭐하겠지. 덤불 옆에
원친 않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무장을 버렸네.
그러나 내 몸을 구했네. 왜 방패를 염려하랴?
가져가라. 못지않은 것을 나는 다시 얻으리라.
― 아르킬로코스
사람들 가운데 누구라도 죽고 나면 존경도 명성도 얻지
못하리라. 차라리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은총을
좇으리라. 가장 나쁜 것은 언제나 죽은 사람의 몫이니.
― 아르킬로코스
최초의 여성 시인이자 플라톤으로부터 열 번째 ‘뮤즈’(예술의 여신)라고 불리었던 사포 역시, 당시 지고의 가치였던 전쟁의 승리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라고 노래하는 파격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기병대가, 어떤 이들은 보병대가
어떤 이들은 함대가 검은 대지 위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이라
말하겠어요.
― 사포
● 고대 그리스에 이미 그 원형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서정시는 당대 그리스인들의 마음과 생활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만큼,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들의 원형을 시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파혼한 약혼자와 그 아버지를 결국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 아르킬로코스의 악에 받친 저주와 노골적인 모욕의 표현은 근래 온라인 SNS에 넘쳐나는 악성 루머와 비방의 기원을 짐작케 한다.
분명히 알아라. 네오불레는
다른 놈이 가져가라.
익을 대로 익어
처녀의 꽃송이는 시들었다.
예전에 그녀에게 있던 우아함마저.
그녀는 욕망을 어쩌지 못한다.
색정에 미친 여인, 젊음의 끝을 보여준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 아르킬로코스
세모니데스가 쓴 여러 여성의 유형을 늘어놓은 시는 소위 ‘여성 혐오’의 역사적인 증거와 같다. 개와 당나귀, 족제비, 암말, 바닷물이나 진흙 등 사물과 동물의 특성에 빗대어 여성을 공격하는 모습은 ‘된장녀’, ‘김치녀’, ‘맘충’ 등 현대 한국의 여성 혐오 표현에서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다른 여인은 바닷물로 만들어져, 양면성을 가진다.
어떤 날 그녀는 웃음을 웃으며 행복하다.
(…)
다른 날에 그녀는 도저히 참아줄 수 없고
도저히 봐줄 수 없어 왜냐하면 성을 내는데
새끼를 지키는 암캐 같아 가까이 할 수 없다.
(…)
다른 여자는 족제비로 만들어졌다.
이 여인은 예쁜 데도 고운 데도 없다.
(…)
다른 여자는 갈기가 많은 암말로 만들어져
천하고 지저분한 일은 남에게 미루고
물레를 돌리지도 않고
― 세모니데스
황인숙 시인은 추천의 글에서 사포의 시를 읽으며 놀랍도록 현대적인 유머 감각에 감탄한다. 한편, 고대와 현대라는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같은 여성 시인으로서 예민한 눈초리로 미심쩍은 평가를 꼬집는다.
내가 누구로 하여금 다시
너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하는가? 너에게
불의한 자가 누구냐, 사포여
― 사포
“이 구절을 쓰면서 사포도 킬킬 웃었을 것 같다. ‘내 사랑을 뿌리쳐? 이런 불의한 자 같으니라고!’ 문득 아리송하다. 플라톤이 사포를 ‘제 10의 뮤즈’라 일컬었다는데, 사람한테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영역에 있는 뮤즈라 했으니 극찬이겠지만, ‘여혐’ 발언 같기도 하다. 뮤즈는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지, 시인이 아니지 않은가.” ― 황인숙(시인)
●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 정서의 고갱이”
간간이 유실된 시행과 작게 조각난 시편의 모습은 약 2500년이라는 그 아스라한 세월을 가늠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이 들려주는 그들의 감정과 생각은 현대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늘의 별처럼 막연하고 묘연하기만 했던 고대 그리스 시인들”의 명성과 비교하자면 순수해 보일 정도로 솔직하고 직접적인 문장들은, 생각보다 쉽게 시를 즐길 수 있도록 독자들을 안내할 것이다.
시인들은 각각 개성적 목소리로, 전쟁에 참여하고,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고, 운동 경기의 승리자를 예찬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실연에 슬퍼하고, 남을 욕하고, 조롱하고, 복수심에 이를 갈고, 가난을 탄식하고, 늙음을 애달파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마음을 노래한다. 분노, 사랑, 슬픔, 욕망, 공포, 혐오, 모욕감, 복수심 등 날 것의 생생한 감정이 날뛰는 시행에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 정서의 고갱이”를 발견할 수 있다.
부는 결코 한 번도, 왜냐하면 눈이 멀었기에,
“히포낙스여, 여기 서른 냥 은전이 있으니, 받아라
그리고 다른 많은 것도.” 말하려 나를 결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마음이 잔인한 부는.
― 히포낙스
정신 맑은 사람들 속에서 술 취한 것은 세련되지 못한 일.
술자리에서 정신이 맑은 것도 세련되지 못한 일. (……)
때때로 탁자에서 일어나라. 배에 굴복하지 마라.
그런 일은 순간만을 사는 노예들에게나 맡기라.
― 테오그니스
나는 백성에게 넉넉할 만큼의 권한을 주었다.
나는 그들 권한의 일부를 빼앗지도 보태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보기에 부유하기까지 한 권력자들에게,
나는 그들에게 마땅한 것만을 주었다.
나는 양자에 맞서 내 권한의 방패를 세워 막았노니
정의에 맞서 그들 가운데 한쪽이 승리하지 못하게.
― 솔론
1 아르킬로코스
2 칼리노스
3 튀르타이오스
4 알크만
5 사포
6 알카이오스
7 세모니데스
8 밈네르모스
9 히포낙스
10 솔론
11 이뷔코스
12 아나크레온
13 시모니데스
14 테오그니스
15 핀다로스
작품에 대하여: 고대 희랍의 노래들 (김남우)
추천의 글: 2500년이 우주에서 하루는 될까 (황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