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자들의 이야기 – 82년생 김지영

난 학교를 빨리 들어갔고, 대학도 빨리 졸업하여 남들보다 3년은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벌써 20여년이 넘었고, 그 사이 영화와 책과 친구들과 함께 신 나게 놀았고, 결혼을 했고, 출산을 2번 했다. 출산휴가도 3개월씩 다녀왔고, 휴가를 붙여서 작은 아이는 백일이 지나고 출근을 했다. 친정 어머니의 내조로 마음 편하게 회사에 다니는 복받은 뻐꾸기다. 20여년을 일하니 조금은 지쳐서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친정 어머니의 내조를 생각하면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집안 일과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평생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으신 어머니. 아버지 기일이 다가오자 마음이 괴로우셨는지 몸이 힘드시다고 하셨다. 4주기를 지내고 조금 나아진 모습을 보니 맘고생이 심하셨구나 싶다. 되도록 일찍 퇴근해야겠다. 애들 방학이라 힘드시고 휴가는 못 드릴 망정 더 힘들게는 하지 말아야지..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나와 관련없다 생각했다. 나보다 10년 늦게 태어났으니 나와 다를 거라 생각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읽을 수록 내가 살아온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놀랐다. 좀 다른 이야기를 하면, 요즘 새로 들어오는 직원들은 나와 띠동갑이 넘는데 그들의 스펙 이야기를 들으면 황당하면서도 답답하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고, 봉사활동은 기본이고 해외에 나가서까지 스펙을 쌓았다는 말을 들으면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이러다 중3인 내 딸도 나중에 이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새 정부가 들어서 나오는 이야기 중 내겐 일자리 창출이 제일 큰 화제였다. 대학이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길 바라는데..

 

왜 지영이라는 호칭을 두고 김지영 씨라고 했나 했더니 그녀와 상담을 한 의사의 시점으로 김지영 씨를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은 자서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정신과의사의 보고서인 셈인데, 책 뒤에 나오는 대로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길 그 공포, 피로, 당황, 놀람, 혼란, 좌절의 연속에 대한 인생 현장 보고서’다.

 

남편이 있고 돌이 지난 딸이 있는 김지영 씨가 백로인 날 갑자기 장모님 말투로 말을 한다. 정서어방 하면서. 눈도 끔쩍거리고. 장난이겠거니 넘어갔는데, 어느날은 동아리 선배의 말투로 말을 한다. 맥주 한잔에 취한 듯이. 얼음이 된 남편. 자꾸 아내가 낯설어지는데 그러다 대박 사건이 일어난다. 추석이 되어 시댁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추석을 보내던 중 시누이의 방문에 갑자기 그녀가 또 장모님이 된다. 우리 앤 명절마다 몸살이라고, 사돈의 딸이 집에 오면 자기 딸도 집으로 보내주라고. 기가 찬 시아버지는 펄쩍 뛰지만, 남편은 아내가 아파서 그런다고 급히 서울로 올라와서 몰래 정신과 의사를 만나고 잠을 못자고 힘들여 보여 상담을 권한다고 말했고, 김지영 씨는 육아우울증 인가 싶었다며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인다.

 

1982년 둘째 딸로 태어난 김지영 씨. 호랑이 태몽을 꾸었지만 셋째도 딸이이라는 산부인과 의사의 말에 아무에게도 말도 못하고 아이를 지운 엄마. 그리고 5년만에 태어난 아들. 할머니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귀한 아들을 구박한다고 딸들을 꾸짖는다.

어머니 오미숙 씨,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오고 초등학교의 짖궃은 짝꿍, 남녀공학이 된 중학교의 교복검열과 바바리맨, 고등학교때 겪은 학원 남학생의 오해 등. 여자라는 단어에 들러붙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학교의 번호와 주민등록번호 모두 남자가 1로 시작한다. 나 또한 원래 그런가보다 하면서 살았다.

 

김지영 씨 언니 김은영 씨의 진로 선택 (은영 씨는 PD, 엄마는 선생님) 명예퇴직한 아버지의 장사 시작과 어머니의 조언,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알바하면서 대학생활도 학점도 엉망이라는 친구, 일과 연봉에 남녀 구분이 있는 회사, 똑부러지는 김은실 팀장의 격려에 힘을 받고, 자정 넘어 대학 다니는 딸 데리러 가면서 지영 씨에겐 술 마져 마시라는 거래처 부장,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대학생 남자친구와 시들해지고, 못 버틸 직원이 버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보다, 버틸 직원을 더 키우는것이 효율적이라는 게 대표, 출산과 더불어 퇴사한 김지영 씨, 모처럼 마시는 1500원짜리 커피로 들은 맘충.

 

난 ‘여자가’ 라는 말도 싫어하지만, ‘여자라서’ 라는 단어도 싫어한다. 여자라서 봐주거나, 여자라서 돈을 덜 받거나, 여자라서 진급이 늦게 되는 상황에는 화가 난다. 능력이 아닌 성별로 평가받는 건 정말 아니다. 그런데 김지영 씨가 들어간 회사는 그런 이치가 통용된다. 군대에 갔다 왔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될 테니 여자보다 월급이 더 많고,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부담스럽고, 결혼 후 출산으로 인한 공백이 없으니 일도 구분되고, 승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면접보러 가는 거 같아 첫손님이지만 태워주었다는 택시 기사 (공짜도 아니면서 왠 생색) 나의 아이들도 이런 세상에서 살아야 하나?

 

김지영 씨와 상담을 했기에 여자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는 의사도 결국 아내의 육아를 도와주지 않는다. 왜 남자들은 집안 일을 한다고 하지 않고, 도와준다고 말을 할까? 혼자 살면 혼자 해야 하는 일들을 결혼 후에는 맞벌이로 일하면서도 아내가 다 하길 바란다. 모든 여자들이 슈퍼우먼도 아니고 아내가 하녀가 아닌데도 그렇다. 휴…..

 

설거지를 마친 후 싱크대에 기대 앉아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2시간 여를 꼬박 읽었다. 읽고 나니 엉덩이가 아프다. 포스트잇을 떼면서 내 맘이 더 무거워졌다.

남자들도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내 엄마가 내 친구가 내 동생이 내 누나가 이런 삶을 살 수 밖에 없구나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해해달라고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럼 도와주겠다는 말을 쓰진 못하겠지. 난 싸움닭이 되고 싶지 않은데..

작가의 말대로 나 또한 세상 모든 딸들이 더 크고, 높고, 많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라고, 내 목소리를 잃지 않도록 살아야겠다 생각한다. 힘들다고 말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나도 소중하고 내가 편하고 여유가 있어야 내 아이들도 편하고 여유있게 살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