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과 적빈이 만들어 낸
야생의 리듬, 광활한 감각
오정국 시인의 새 시집 『눈먼 자의 동쪽』이 <민음의 시> 229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내설악의 적막함과 비슈케크의 고독감, 제주의 쓸쓸함을 맹목과 적빈의 길항 속에서 시집에 새긴다. 눈먼 자의 동쪽은 이미지나 상상 속 동쪽이 아닌, 시인의 체화 속에 마련된 공간이며 모종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오정국 시인이 내밀하게 촬영하고 오래 다듬은 ‘숲의 다큐멘터리’에 독자를 초대한다.
■ 몸에 바로 닿는 맹렬한 한파
강줄기 한복판의 얼음장이 가장 시퍼렜다 거기서 누가 수심을 잰 듯, 나무 막대기가 수직으로 꽂혀 있었고, 그걸 꽂아 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모서리 없는 햇빛의 책방이었다
-「햇빛의 책방-내설악일기(日記)‧13」에서
눈먼 자에게 동쪽은 시각을 제외한 이미지로 존재할 것이다. 시집의 초반부에 동쪽은 ‘내설악’을 대표로 하는, 강원도 인제 곳곳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눈먼 자로 믿겨지지 않을 만큼 회화적이나, 눈이 아닌 다른 감각기관을 살아나게 할 만큼 비회화적이기도 하다. ‘혹한기 훈련의 콧김’부터 ‘죽을힘 다해 부릅뜬 삵의/ 눈동자’에 이르기까지 눈먼 자의 눈은 산간지방의 겨울을 매섭게 훑어 내린다. 이는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이야기’여서 눈보다는 피부에 가까운 감각이다. 맹렬한 한파는 눈보다는 몸에 바로 닿으며, 오정국의 시는 휘몰아치는 바람 혹은 얼어 버린 강의 표면에 가깝다. 감당할 수 없는 시의 냉기 앞에 우리는 모든 감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내설악부터 오정국의 여행은 시작되며, 독자는 스무 편에 이르는 내설악일기 연작을 다 읽고 나서야, 그러니까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 스노체인까지 마련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눈 위에 놓인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나설 수 있는 것이다.
■ 고독에서 비롯된 처연한 기록
검은 암벽을 흘러내리는 희고 붉은 흙모레들, 돌산 봉우리가 적빈(赤貧)의 고요를 견디지 못한 탓이리라 내 몸의 허기도 저 골짜기 어디쯤에서 굶어 죽기를 바라는데
-「가시덤불의 비닐봉지-비슈케크일기(日記)‧2」에서
내설악을 떠난 시인은 중앙아시아의 설산으로, 제주도의 찬 벼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행로는 흡사 홀로 촬영 중인 다큐멘터리 감독과 같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찍듯 건조한 언어를 구사하며 촬영의 결과를 재배치하는 편집자가 되어 시집의 구성을 처연히 마무리한다. 다큐멘터리의 공간은 결국 숲이었으며, 시인은 숲을 이루는 나무와 나무를 파먹는 짐승과, 그 짐승을 쫓는 또 다른 짐승을 오랜 시간 탐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느 생의 언젠가를 통과했던/ 길목들’이고 ‘내 캄캄한 후생의 얼굴들이/ 겹겹의 파도로 떠밀려 왔’던 곳이며 그곳의 감독 혹은 시인은 ‘뜻밖의 장소에 떨어진 운석’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시인이 장구한 다큐멘터리로서 시를 완성한 동력은 결국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고독의 힘이었다. 그 고독의 처연함 속에서 눈사람의 먼눈은 동쪽을 향해 그 빛을 발하고 있다.
■ 추천의 말
“진흙을 밟아서 진물이 흐를 때까지/ 내 목청을 불태우듯 흩날리는/ 노래 몇 줄”이 시가 되는 까닭은 흔들리면서도 매번 가까스로 중심을 수복하는 언어가 맹목의 섭리와 적빈의 생을 붙드는 진자의 고정점에서 운동하기 때문이다. 오정국 시집 『눈먼 자의 동쪽』은 맹목과 적빈의 간극에서 운동하는 고정점을 지닌, 어떤 허위도 마다하는 진짜다. -조강석(문학평론가)
1부
터널 밖에는 13
패악이라면 패악이겠지만 ― 내설악일기(日記)·1 15
발을 멈추면 물소리가 높아지던 ― 내설악일기(日記)·2 16
돌 하나의 두억시니에는 ― 내설악일기(日記)·3 18
그 눈밭의 오줌 자국은 ― 내설악일기(日記)·4 20
짐승에게 쫓기는 짐승처럼 ― 내설악일기(日記)·5 21
머리띠를 묶은 파도가 달려오듯 ― 내설악일기(日記)·6 22
불멸(不滅)의 밤 ― 내설악일기(日記)·7 23
미끈거려도 미끄러지지 않고 ― 내설악일기(日記)·8 25
나는 저 눈꽃들에게 ― 내설악일기(日記)·9 26
뼈다귀 몇 점 나무토막처럼 ― 내설악일기(日記)·10 27
목에 비수를 들이대듯 ― 내설악일기(日記)·11 29
교각의 하류는 튜브처럼 찌그러져 ― 내설악일기(日記)·12 30
햇빛의 책방 ― 내설악일기(日記)·13 32
북천의 달 ― 내설악일기(日記)·14 33
저의 굶주림을 저가 파먹듯 ― 내설악일기(日記)·15 35
삵 ― 내설악일기(日記)·16 36
독대(獨對) ― 내설악일기(日記)·17 38
반달 모양으로 돌을 막아서 ― 내설악일기(日記)·18 40
눈 뭉치로 눈 벼락을 맞는 ― 내설악일기(日記)·19 41
눈먼 자의 동쪽 이야기 ― 내설악일기(日記)·20 42
동짓달 스무하루 45
2부
겨울 양안치 49
작고 야무진 발꿈치들 52
독작(獨酌) 54
객사(客舍) 56
겨우살이, 겨울살이 58
새 60
그해 여름 시집들 62
그해 여름의 8월은 64
새 66
돌의 초상·1 68
돌의 초상·2 70
돌의 초상·3 72
땡볕 73
노름꾼처럼 곁눈질하는 74
내 눈이 춤추고 겅중거리는 75
4월의 검은 나무둥치 ― 비슈케크일기(日記)·1 76
가시덤불의 비닐봉지 ― 비슈케크일기(日記)·2 78
만년설의 흰빛을 수의처럼 ― 비슈케크일기(日記)·3 80
국경의 묘지 ― 비슈케크일기(日記)·4 81
어느 생의 언젠가를 ― 비슈케크일기(日記)·5 83
설산의 붉은 창고 ― 비슈케크일기(日記)·6 85
철사처럼 경련하며 뻗어 가는 힘이 ― 에곤 실레, 「무릎을 꿇은 여자 누드」(1910) 86
금빛의 가운을 두른다고 해서 ―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1908) 88
해골성당 90
3부
밤의 트랙 95
해질녘의 거미줄 96
둘레길의 원둘레 98
낙상(落傷) 100
내가 아는 통나무는 102
통나무를 대신하여 104
저수지라고 부르기엔 106
계곡지 밤낚시 108
동짓날 가마솥의 팥죽 같은 ― 제주시편(詩篇)·1 110
파도가 애월이라고 소리치던 ― 제주시편(詩篇)·2 112
물밑의 검은 여 ― 제주시편(詩篇)·3 114
콜라비 ― 제주시편(詩篇)·4 116
파도는 저렇게 몸을 세워서 ― 제주시편(詩篇)·5 118
숲의 외곽 120
숲의 다큐멘터리 122
발밑 싱크홀 132
날마다 싱크홀 134
강 건너 무인텔 136
광장, 벽화 138
타오르는 춤 140
눈사람의 이름으로 142
은둔하는 밤의 채널 144
특파원 시절의 감옥 147
철문을 닫아 걸 이유가 없다 149
또 다시 사막으로 151
작품 해설
맹목과 적빈의 리듬│조강석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