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 2004년 11월 20일

내게 ‘헤르만 헤세’란 어렵고 딱딱했다. 중학교 도덕선생님께서 <수레바퀴 아래서>를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셔 그날 바로 도서관에 달려가 읽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덮은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도 괜시리 ‘헤르만 헤세’는 책 표지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이후로 소설이라는 장르는 집중하기 어렵기도 했다.

그러다 <크눌프>를 읽게 됐다. 그것도 굉장히 우연히. 학생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애매한 시기를 보내면서 인간관계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이 책은 그런 나를 위로해 줬고.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를 막연한 두려움(소설, 헤르만 헤세, 그리고 인간관계 모두)을 무찌를 수 있게 해줬다.

이보게, 나 내 생애에 두 번의 사랑을 경험했어, 진정한 사랑을 말하는 걸세. 두 번 다 난 이 사랑은 영원한 것이고 오직 죽음으로써만 끝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었지. 그런데 두 번의 사랑이 모두 끝났고, 난 죽지 않았어. 내겐 고향에 친구도 하나 있었어. 우리가 살아 있는동안 서로 연락도 없이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지. 하지만 우린 이미 오래전에 연락이 끊겼다네. (p. 70)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스스로 꽤나 무던하고 독립적인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사소한 관계마다 상처를 받고 혼자 치유조차 못하는 내가 한심스러워 자책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나 크눌프와 친구의 대화를 통해 위로를 받았다. 세상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윤리들이 사람들을 가두곤 한다. 그 중 하나가 ‘영원한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상상조차 어려운 추상적인 그 표현이 다양한 인간관계에 상처받은 사람을 다시 한 번 고문하고 모른체한 건 아닐까. 소설 속 크눌프의 자유로운 행동들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책은 비교적 짧고 쉽지만, 문장들을 곱씹을 수록 깊이가 있는 소설이라고 본다. 그런게 헤세만의 매력이라면 다른 소설들을 더이상 지체하지 않고 읽기 시작해야겠다. 

정말 그래, 크눌프. 적절한 순간에 바라보면 거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

그래, 하지만 난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항상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왜 그렇지?

…(중략)… 어떤 아름다운 것이 그 모습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난 그것을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걸. 이것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꼭 오늘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야. 반대로 연약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난 그것을 바라보게 되지. 그러면서 난 기쁨만 느끼는 게 아니라 동정심도 함께 느낀다네.

(p.68)